유시춘 교육방송(EBS) 이사장, 권태선 전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 남영진 전 한국방송(KBS) 이사장을 비롯한 공영방송 이사들이 지난달 21일 오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윤석열 대통령의 공영방송 장악 중단을 촉구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이종규 | 저널리즘책무실장·논설위원
윤석열 정부가 공영방송을 장악해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평행이론’이 떠오른다. 익숙한 과거가 고스란히 재연되고 있어서다. ‘방송통신위원회 장악→감사원 등을 동원한 공영방송 옛 여권 이사 솎아내기→이사회 인위적 재편→사장 해임’이라는 뻔한 공식이 이번에도 어김없이 활용되고 있는 중이다.
이 공식이 ‘확립’된 지 15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효험은 여전하다. 김의철 한국방송(KBS) 사장이 이 공식에 따라 이르면 12일 해임될 예정이다. 빈자리에 정권이 내리꽂은 ‘코드 사장’이 입성하면 방송 장악 드라마가 완성된다. 이사든 사장이든 정해진 임기가 있지만, 이 공식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다. 분명 비정상인데 마치 정상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옛 권력에서 새 권력으로 ‘손 바뀜’이 일어난다.
이런 “소모적인 복수의 누아르”(홍원식 동덕여대 교수)가 되풀이되는 이유가 뭘까? 현행 공영방송 지배구조가 정치 예속을 당연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행 방송법과 방통위 설치법은 곳곳에 방송의 자유와 독립성 등을 규정하고 있다. 그래 놓고는 정작 방송의 독립성 보장을 위해 가장 중요한 공영방송 경영진을 집권세력 뜻대로 갈아치울 수 있도록 했다.
방송법 등을 보면, 한국방송 사장은 이사회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한다고 규정돼 있다. 문화방송(MBC)은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방문진) 이사회가 사장을 뽑는다. 공영방송 사장 선임의 키를 쥐고 있는 이사들은 방통위의 추천을 거쳐 대통령이 임명하거나(한국방송), 방통위가 직접 임명한다.(방문진) 문제는 방통위가 공영방송 이사들을 임명하거나 추천하는 과정에서 정치권이 나눠먹기 식으로 추천권을 행사한다는 점이다. 한국방송은 여야 7 대 4, 방문진은 6 대 3의 비율로 자기 사람을 이사회에 밀어넣는다.
그러나 정치권이 공영방송 이사를 나눠먹기할 법적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각 분야 대표성과 전문성을 고려해 임명한다는 규정만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정치권은 관행적으로 ‘자기 몫’을 주장하며 이사를 추천해왔다. 관행이 오래되다 보니 이제 거의 제도로 굳어져 버렸다. 정권이 바뀌면 옛 여권 이사를 찍어내고 그 자리에 친정부 인사를 앉혀 이사회를 여당 우위로 재편한 뒤 사장을 교체하는 일이 당연하다는 듯 반복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제도화된 관행’의 근원은 방통위다. 방통위는 5명의 상임위원으로 구성되는데, 위원장을 포함한 2명을 대통령이 지명한다. 나머지 3명은 여당이 1명, 야당이 2명을 추천한다. 여야 3 대 2 구도에서 재적위원 과반수 찬성으로 의결을 하다 보니 야당 추천 위원은 들러리 구실을 할 뿐 모든 결정이 대통령 의중대로 이뤄진다. ‘독립적 운영 보장’을 위해 별도의 법에 따라 설치된 합의제 행정기관의 위상을 스스로 형해화하는 구조다. 공영방송 이사회의 여야 비율 관행도 방통위의 3 대 2 구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언론계에서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여야가 공수를 교대해가며 벌여온 ‘공영방송 쟁탈전’을 ‘정치적 후견주의’의 틀로 설명한다. 정치권력이 인사권을 매개로 공영방송의 후견인 노릇을 해왔다는 것이다. 피후견인(공영방송 사장)이 자신을 발탁해준 후견인에게 충성(정권 나팔수)으로 보답하는 것이 후견주의의 속성이다. 후견주의를 유지시켜주는 기제가 바로 ‘공영방송 이사 정당 추천’을 뼈대로 하는 현재의 공영방송 지배구조다.
후견주의는 이명박 정부 집권 첫해인 2008년 방통위가 출범하면서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정당 추천’도 당시 정연주 한국방송 사장을 해임하는 과정에서 사실상 공식화했다. 문재인 정부는 대선에서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을 공약으로 제시했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집권 첫해 고대영 한국방송 사장을 해임하는 과정은 이명박 정부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특히 2020년 총선에서 압도적 다수가 됐음에도 검찰개혁에 ‘다걸기’(올인)하느라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에 손을 놓은 것은 두고두고 아쉬운 일이다. 윤석열 정부의 방송 장악 폭주는 그 ‘부작위’의 후과라 할 수 있다.
야당이 된 더불어민주당은 윤석열 정부의 방송 장악이 본격화하자 부랴부랴 공영방송 정치적 독립을 위한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법’ 처리에 나섰다. 정치권의 이사 나눠먹기 관행을 끊고, 사장 선출 때 특별다수제(3분의 2 찬성으로 의결)를 도입하는 것이 뼈대다. 이 법안은 민주당 주도로 국회 본회의에 부의됐지만, 여당은 거부권 행사를 공언한 상태다.
법원이 11일 권태선 방문진 이사장이 방통위를 상대로 낸 해임 처분 집행정지 신청을 받아들였다. 견고한 ‘방송 장악 공식’에 균열을 낸 의미 있는 결정이다. 그러나 재판부마다 판단이 다를 수 있는 가처분 결정에 기대서는 정치권의 공영방송 침탈을 막기 어렵다. 정치적 후견주의의 고리를 끊을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이 근본 해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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