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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슬기로운 기자생활] 예술이 비극이 될 때

등록 2023-10-12 18:56수정 2023-10-13 02:42

지난달 1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정기국회 개회식이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1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정기국회 개회식이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이우연 | 정치팀 기자

정치부 기자에게 필요한 덕목을 여럿 꼽을 수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정치권에 떠다니는 수많은 시나리오 중 가장 그럴싸한 걸 골라내는 능력 아닐까. 여의도에선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아요?”라는 질문을 자주 하고, 정치인들은 나름의 경험과 정보를 바탕으로 전망을 내놓는다. 그중 일부가 기자를 거쳐 독자들에게 소개된다.

신중하게 생각해 골라냈건만, 종종 예상하지 못한 시나리오가 현실이 되기도 한다. 가끔은 틀린 전망을 제공한 정치인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는다. 그럴 때면 돌아오는 면피용 한마디. “이 기자, 정치는 가능성의 예술이라잖아.” 명언에도 저작권이 있다면 비스마르크와 후손은 꽤 많은 돈을 벌었을지도 모른다.

정치부 기자로서 마냥 아름다운 ‘가능성의 예술’만 본 건 아니다. 떠올리기 싫은 ‘가능성의 비극’도 있었다. 2020년 총선을 앞두고 벌어진 ‘위성정당 사태’가 그랬다. 20대 국회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정의당 등과 연합해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지역구에서 얻은 의석수가 전국 정당 득표율에 미치지 못한 정당에 일부 비례대표 의석을 우선 배정하는 제도)를 골자로 한 선거법을 통과시킨 건 분명 가능성의 예술이었다. 다수 정치학자가 정치 양극화를 해소할 선거제로 꼽았던 제도였기 때문이다.

비극이 시작된 것은 미래통합당(국민의힘 전신)이 위성정당인 미래한국당을 만들 때부터였다. 지역구 후보는 내지 않고 비례대표 후보만 내는, 비정상적인 정당이었다. 선거법 개정의 취지를 무력화했다며 비판하던 민주당은 총선을 한달 앞두고 같은 일을 벌였다. 위성정당 창당이 결정되자 따라잡기 벅찬 전개가 뒤를 이었다. 당 이름이 ‘더불어시민당’으로 정해지고, 투표용지에서 앞 순번을 차지하기 위해 현역의원 꿔주기가 이뤄졌다.

압권은 비례대표 후보를 공천하는 과정이었다. 앞서 민주당이 꼬박 한달에 걸쳐 해낸 비례대표 공천 절차를 더불어시민당은 일주일 만에 해치웠다. 급조된 당사에서 당선 순위권에 공천된 한 후보에게 전화를 걸었던 때가 생각난다. “제가 됐다고요? 그냥 넣어봤는데, 진짜요?” 지금은 민주당 초선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경품 당첨 전화를 받은 듯,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체면은 구겨졌으나 그때의 판단으로 민주당은 300석 중 180석을 얻었다. 크게 이겼으니 다 괜찮은 걸까. 요즘 몇몇 민주당 의원들은 사석에서 “생각해보면 180석이 탄생하는 그 순간이 비극이었다”고 토로한다. 거대 야당 단독으로 법안을 통과시키고, 대통령은 거부권을 남발하며 국회의 입법권을 무력화하는 게 반복되는 정치 상황을 보고 있자면, 그때 그 가능성은 아무리 생각해도 비극이었다. 21대 국회는 굳건한 양당 구조에선 어떤 정치적 상상력도 들어서지 못한다는 교훈을 남겼다.

국정감사 등으로 여야의 선거제 협상은 잠시 중단됐다. 정치권에서는 거대 양당이 정당 득표율에 따라 비례의석을 단순 배분하는 과거의 병립형 비례대표제에 합의해 양당 구조를 굳힐 것이라는 시나리오가 몇달째 돌고 있다. 민주당은 지난해 대선을 앞두고 위성정당 방지와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당론으로 채택한 바 있어, 아직까진 믿기 어려운 전망이다. 설마 이번 총선에서도 가능성의 비극을 기록하게 될까. 궁금하면서도 두렵다.

aza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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