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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먹다 남은, 그 은박지 김밥 [이종건의 함께 먹고 삽시다]

등록 2023-11-08 14:33수정 2023-11-09 02:09

김밥. 한겨레 자료사진
김밥. 한겨레 자료사진

이종건 | 옥바라지선교센터 활동가

지하철 출근길에서 마주치는 가판대에는 어김없이 은박지로 싼 김밥이 올라와 있다. 잔뜩 구겨진 은박지를 만져보면 새벽에 갓 포장해서인지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김밥. 요새는 지하철 상가에 프랜차이즈도 제법 들어와 한줄에 5천원씩 받는 속을 꽉 채운 어엿한 김밥집이 많아졌지만, 현금을 준비해 뒀다가 채가듯 채반에서 하나씩 가져가는 가판대 은박지 김밥의 운치는 못 따라온다. 그렇게 한줄 사다가 출근길 훔치듯 후다닥 먹는 따뜻한 김밥을 누군들 싫어할까.

하지만 별미는 따로 있지. 두어개 집어먹고 가방에 넣어뒀다 출출한 오후쯤, 불현듯 생각나 꺼내먹는 ‘신선하지 않은 김밥’의 맛. 갓 만들었을 땐 시금치나물이며 계란, 단무지, 당근 모두 각각의 맛이 느껴지지만 오후쯤 되면 냄새와 색이 서로 엉켜 밥에 스며든다. 특이한(?) 취향 탓인지 나는 그렇게 엉켜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노란색 단무지 물이 스민 오후의 덜 신선한 김밥이 좋다.

뉴타운 개발 여파로 멀쩡하게 살던 동네에서 쫓겨날 위기에 놓였던 2018년 서울 성북구 장위7구역. 강제집행을 앞두고 철거민들이 건물 옥상에 설치된 교회 첨탑에 매달려 10시간 넘도록 고공농성 중이었다. 전기도, 물도 끊긴 채 강제집행을 기다리는 이의 심정에 공감한 연대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옥상과 집 앞에서 첨탑에 오른 이들을 지키기 위해 연좌하고 있다. 요구는 간단했다. 폭력적인 강제집행이 아닌 대화. 못해도 수십년은 멀쩡히 살 수 있을 것 같았던 동네는 어느 날 갑자기 철거지역이 됐다. 아침마다 골목을 쓸던 할아버지도 쫓겨났고, 이웃한 파란 철문 집도 몇번 강제집행 끝에 쫓겨났다. 어제까지 사람이 살던 집에는 빨간 래커로 ‘공실’이 휘갈겨 있고, 창문은 부서졌다. 정장 입은 용역들이 제집 드나들 듯 골목을 어슬렁거리고, 이를 피해 다니던 주민들이 하나둘 떠나기 시작한다. 주민이 사라진 골목은 언제 그랬냐는 듯 빠르게 생기를 잃는다. ‘일상’이라 이름 붙여졌던 동네의 오래된 삶들은 이렇듯 구체적으로 파괴되고, 은폐됐다.

물과 전기가 없으니 밥을 지어 먹을 수도, 라면 하나 끓여 먹을 수도 없는 처지였다. 그래도 누구 하나 볼멘소리하는 이 없다. 그때 골목 가로질러 오토바이 한대가 들어온다. 용역이 막아봐야 소용이 없다. 퀵 기사님은 그저 배달할 물건을 내비게이션에 적힌 주소에 내려두고 떠날 뿐이다. 기사님이 가져온 아이스박스에 은박지로 싼 김밥이 상자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멀리서 소식을 들은 이웃 교회 목사님이 보내준 비상식량이었다. 강제집행을 앞둔 집 문을 열 수가 없어, 옥상에서 빨간 노끈을 내려 봉지에 넣은 김밥을 묶어 올리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김밥은 모두가 배부르게 먹고도 남았고, 밤새워 이어지는 농성에 출출해 남은 김밥을 먹노라면 좋아라 하는 ‘덜 신선한 김밥’ 맛이 났다. 그제야 알았다. 음식 모자란 것은 참지 못하는 우리 성정에 행사 때 김밥도 늘 사람 숫자보다 넉넉히 주문하니, 언제고 은박지 김밥 몇줄은 남기 마련이었구나. 김밥을 씹노라면 종종 그 날이 생각난다.

장위 7구역은 사라졌고, 장위 뉴타운 개발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오늘도 어디선가 덜 신선한 김밥을 먹을 사람들이 있을 테지. 더러는 나처럼 취향이고, 또 더러는 그저 오늘 하루의 처지이기도 할 것이다. 함께 먹을 요량으로 김밥을 주문하거든, 조금 넉넉히 주문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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