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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젠 너답게 살아”

등록 2023-12-04 18:19수정 2023-12-05 02:09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똑똑! 한국사회] 허진이 | 자립준비청년

“손 씻을 때 손가락 사이사이와 팔꿈치까지 씻어야 깨끗하다고 느껴요.”

“열려 있는 문을 보면 닫아야만 마음이 편안해져요.”

“저는….”

대학 시절, 심리학 전공 수업을 들을 때였다. 교수님은 조별 활동으로 내가 가진 강박에 관해 조원들과 이야기 나누라는 과제를 주셨다. 학우들은 큰 어려움 없이 자신의 강박을 설명하는데, 난 이상하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는 말이 맞겠다. 그때서야 나는 스스로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때뿐만이 아니었다. 친구들과의 일상적인 대화에서도 나는 어떤 것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말한 기억이 거의 없다. 자신이 무엇을 추구하는지 스스로에 대해 명확하게 말하는 친구들의 모습을 볼 때면 부럽기도 했다.

보육원에서 자라는 동안 ‘나’에 관해 생각할 기회가 얼마나 있었을까. 항상 언니들이 물려준 옷을 입고, 똑같은 활동복을 입고, 주말 여가생활조차 계획에 맞춰 단체활동을 했다. 또 나에게 매달 쥐어지는 적은 용돈은 내 취향보다 저렴한 가격에 좌우되었다. 이런 곳에서 기호와 개성을 찾고, 나답게 지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또한 나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타인의 꾸준한 관심이 필요했다. 돌 지난 아이를 키우는 지금 절실히 깨닫는다. ‘내 딸은 버섯을 좋아하는구나’, ‘집중력이 정말 좋네’와 같은 부모의 애정 어린 관찰과 관심이 아이에게 닿아 ‘나는 버섯을 좋아하는 사람’, ‘나는 집중을 잘하는 사람’이라는 자아를 형성하도록 하는 것 말이다. 많은 아이와 시설 선생님의 관심을 나눠 가졌던 유년 시절을 보낸 나로서는 스스로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보육원 퇴소를 앞둔 어느 날 생활반 선생님은 내게 ‘이젠 너답게 살아’라는 짧은 한마디만 하셨다. 시설에서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애정의 한계를 알기에 선생님의 말 한마디에는 그간의 미안함이 묻어 있었다. 퇴소 뒤 자립 생활은 온전히 내 몫이었다. 먹는 것, 사는 것, 살아가는 것 모두 나의 선택으로 만들어가야 했고, 오랜 시간 시행착오를 겪으며 조금씩 ‘허진이다움’을 알게 되었다.

자립 뒤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답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 잘하는 것이 있어야 진로를 선택할 수 있고, 나와 잘 맞는 혹은 맞지 않는 사람을 알아야 주변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내 것이 없는 채 남에게 휘둘려 선택하다 보면 성적만 맞춰 들어간 학교도, 사정이 급해 들어간 회사도, 대화가 잘 통하지 않는 친구도 모두 내게 맞지 않는 옷일 뿐이다.

나를 모른 채 굳어져버린 습관과 삶의 태도 속에서 고유한 ‘나’를 찾는 것은 혼란스럽고 외로웠다. 퇴소를 앞둔 동생들과 자립하고 있는 동료들은 사회로 나오기 전 좀 더 단단한 내가 된 상태에서 발을 내디뎠으면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양한 경험 속에서 자신을 탐색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누군가의 애정 어린 관찰과 관심 또한 필요하다. 자립준비청년 지원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있는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그 출발점은 이 청년이 얼마나 자신답게 살 수 있을 것인가에 맞춰지면 좋겠다.

오늘도 나다운 하루를 보내기로 결심했다. 날이 부쩍 추워진 탓에 감기 기운이 있는지 목이 따끔해서 나에게 효과가 좋았던 탕약을 데워 마셨다. 저녁에는 식구들이 먹을 반찬을 만들 것이다. 내가 만든 ‘반찬데이’이기 때문이다. 오늘처럼 네다섯 종류의 반찬을 만드는 날에는 요리하며 볼 영화도 틀어 둔다. 봤던 영화를 두세번 보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몇달 전 재밌게 본 영화를 또 볼 예정이다. 이렇게 나의 결정으로 하루를 채우는 것이 이제는 익숙해졌다. 지금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나는 내가 되었다. 이젠 나답게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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