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8월23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이동관 방송통신위원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뒤 인사를 받고 있다. 대통령실 사진기자단
이종규 | 저널리즘책무실장·논설위원
대통령과 악수를 하며 90도로 고개를 숙이는 장면, 참으로 생경했다. 봉건군주 시대 작위를 내리는 ‘주군’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충성을 맹세하는 ‘가신’을 보는 듯했다. 이처럼 이동관씨의 행보는 방송통신위원장 임명장을 받는 날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한겨레는 8월26일치에 실린 임명장 수여 사진에 ‘권력 앞에 폴더 인사’라는 제목을 달았다.
그때 기억이 뇌리를 스친 건, 최근 이동관씨의 ‘사퇴의 변’을 읽으면서다. 그는 윤석열 대통령이 그의 면직안을 재가한 지난 1일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가 방통위원장직을 사임한 건 오직 국가와 인사권자인 대통령을 위한 충정에서입니다.” 물론 훗날을 기약하려면 떠나는 마당에도 대통령의 눈도장을 받아놔야 한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다고 누구나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주군’을 향한 일편단심 하나는 인정해줄 만하다.
문제는 그가 맡았던 방통위원장이라는 직위가 높은 수준의 독립성을 요구받는 자리라는 점이다. 방통위설치법은 “방송의 자유와 공공성 및 공익성을 높이고 방통위의 독립적 운영을 보장”하는 것을 법의 목적으로 삼고 있다. 방통위원장이 독립성을 내팽개친 채 ‘대통령 바라기’를 자처한다면 방송법이 규정한 방송의 자유와 독립은 형해화될 수밖에 없다. 요컨대 방통위원장은 ‘인사권자인 대통령을 위한 충정’ 운운할 자리가 아니라는 얘기다. 하기야 국회에 출석해 여당을 “저희 지도부”라고 일컫는 이에게 독립성을 따지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긴 하다.
이동관씨가 방통위원장으로 취임한 날, 언론노조 한국방송(KBS)본부는 그가 대통령 앞에서 시전한 ‘폴더 인사’를 언급하며 성명서에 이렇게 썼다. “앞으로 이동관씨가 이끌어갈 방통위도 그러할 것이다.” 오로지 대통령에게만 충성하며 정권 편향적인 방송을 만들어갈 것이라는 우려였다. 사실 내 생각도 딱 그랬다. 이동관씨가 허리를 깊숙이 숙이고 대통령이 위에서 내려다보는 광경에서 ‘정치적 후견주의’의 그림자를 봤다고 하면 지나칠까.
정치적 후견주의는 정치권력이 인사권을 매개로 공영방송의 후견인 노릇을 하는 것을 말한다. 후견인이 관직을 내리면 피후견인은 충성으로 보답하는 것이 후견주의의 본질이다. 지금처럼 방통위가 공영방송 이사진을 ‘물갈이’할 권한을 갖고 있는 상황에선 방통위원장이 후견주의의 핵심 고리가 될 수밖에 없다. 방송사의 생살여탈권을 쥔 방통위원장이 대통령에게 충성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대통령의 방송’, 곧 어용 방송을 헌정하는 것이다. 이동관 방통위 100일의 온갖 우격다짐은 바로 그 목표 하나로 수렴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최근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야당이 자신을 탄핵하려는 이유에 대해 “박민 사장 임명 이후 KBS가 정상화되는 걸 보면서 마음이 급해졌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렇다. 그의 정신세계에서 ‘정상적인’ 방송은 이래야 한다.
우선, 외국을 방문한 대통령의 의전행사는 메인 뉴스에 5분36초에 걸쳐 보도해야 한다. 뉴스를 진행하는 앵커가 “국제사회에서 가장 화려한 의전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는 멘트를 날리는 센스를 보여주면 금상첨화다. 사상 초유의 행정전산망 마비 사태로 큰 혼란이 발생했더라도 메인 뉴스의 첫 꼭지에는 대통령의 국제회의 참석 소식을 다뤄야 한다. 이런 게 바로 ‘진짜뉴스’다. 권력자가 불편해할 만한 시사프로그램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단박에 폐지해야 한다. 즐겨 보던 프로그램을 하루아침에 잃게 될 시청자들의 처지는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다. “저희 지도부”가 그런 불경한 프로그램을 하루라도 더 보게 해서는 안 된다.
이동관씨는 사퇴 기자회견에서 “언론 정상화의 기차는 계속 달릴 것”이라고 했다. 법원의 제동으로 ‘가짜뉴스의 온상’ 문화방송(MBC)을 ‘정상화’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던 모양이다. 이명박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이 자행한 ‘언론 장악 공작’의 표면적 이유도 ‘방송 정상화’였다. 국정원 문건에는 ‘홍보수석 요청자료’ ‘배포: 홍보수석’이라는 말이 여러 차례 나온다. 당시 청와대 홍보수석이 이동관씨다. 그런 ‘정상화’, 도대체 누굴 위한 것인가.
그는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내가 그만두더라도 제2, 제3의 이동관이 나올 것”이라고 했다. 과연 그가 자리를 비우기가 무섭게 ‘제2의 이동관’들이 거론되더니, 결국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 출신인 김홍일 국민권익위원장이 그 자리를 꿰찼다. 특별수사 하듯 언론을 잡도리하겠다는 뜻인가. 더욱이 그는 중수부장 시절 윤 대통령을 수하(중수2과장)에 둔 직속상관이었다. 믿고 맡길 수 있는 ‘검찰 하나회’ 선배를 통해 방송을 확실하게 틀어쥐겠다는 의도일 것이다. ‘원조’ 언론 장악 기술자는 물러났지만, 언론 자유의 혹한기는 계속될 것 같다.
jkl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