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2·12 쿠데타를 소재로 한 영화 ‘서울의 봄’이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다. 지난달 22일 개봉 이후 박스오피스 1위를 놓치지 않더니 11일 현재 관객 700만을 돌파했다. 이런 기세라면 ‘범죄도시3’에 이어 올해 두번째 1000만 영화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영화는 ‘전두광’ 일당이 9시간 만에 쿠데타에 성공한 것으로 끝나지만, 실제 전두환·노태우가 주도한 군사 반란은 하루 만에 끝나지 않는다. 신군부는 1980년 5월 초 비상계엄 전국 확대와 국회 해산, 비상 기구 설치 등을 뼈대로 하는 집권 시나리오를 만들어 실행해 나간다. 이에 저항하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무참히 진압한 전두환 일당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해 정부를 장악하고 언론 통폐합과 정치활동 금지 등 반헌법적 조치를 밀어붙인다. 그해 8월16일 신군부의 압박에 굴복해 최규하 대통령이 사임하자 전두환은 8월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 선거에 의해 제11대 대통령이 된다. 전두환은 자신의 집권 기반이 안정됐다고 판단한 1981년 1월24일 비상계엄을 해제한다. 김영삼 정권의 검찰은 전두환·노태우가 12·12부터 5·18에 이르기까지 저지른 만행을 반란(수괴)죄로 기소해 유죄판결을 받아낸다.
‘성공한 쿠데타’에 대한 처벌도 드라마틱하다. 애초 검찰은 1994년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궤변으로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렸으나, 이듬해 김영삼 대통령이 특별법을 만들어 재수사를 ‘지시’하자 태세를 전환했다. 먼저 ‘4000억 비자금’으로 노태우를 구속한 검찰은, 전두환이 수사에 반발해 ‘골목성명’을 발표하고 고향으로 내려가자 다음날 새벽 그를 서울로 압송한 뒤 그해 12월21일 노태우와 함께 기소한다. 나머지 신군부 일당도 공소시효 만료 하루 전인 1996년 1월23일 전원 기소된다. 1년여에 걸친 재판 끝에 전두환은 1심 사형→2심 무기징역, 노태우는 징역 22년6개월→징역 17년으로 감형돼 대법원에서 확정된다. 나머지 일당도 박준병(20사단장, 무죄)을 제외한 전원이 징역형이 확정됐다.
‘성공한 쿠데타’라며 불기소 처분한 장윤석 당시 서울지검 공안1부장은 국민의힘 전신인 한나라당에 입당해 3선 의원을 지냈다. 12·12를 “나라를 구하려던 것”이라고 미화한 신원식은 국민의힘 비례대표 의원이 된 뒤 윤석열 정부의 국방부 장관이 됐고, ‘5·18 북한 개입설’의 김광동은 진실화해위원장이다. 우연의 일치인가.
이춘재 논설위원
cjl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