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11월2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2030년 세계박람회(엑스포) 유치 실패에 대해 사과하는 대국민 담화문을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박민희│논설위원
윤석열 대통령이 16번째 해외 순방인 네덜란드 국빈 방문을 마쳤다. 대통령실이 적극 홍보해온 ‘외교 대통령’ ‘1호 영업사원’의 가면은 모두 벗겨졌다. 세계박람회(엑스포) 유치 투표에서 사우디에 119대 29로 참패했고, 과도한 순방에 대한 여론의 우려 속에 ‘반도체 동맹’을 성과로 내세워 네덜란드를 국빈방문했지만 과잉 의전 때문에 네덜란드가 한국 대사를 초치하기까지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윤석열 정부의 총체적 외교 난맥상이 여기서 멈춘다면 그나마 다행일 것이다. 2024년에는 진정한 외교·안보 시험대가 닥쳐오고 있다. 대통령실은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가 임박했다고 밝혔다. 새해 초부터 한반도의 긴장이 급속히 고조될 가능성이 높다. 정부는 지난달 9.19 남북군사합의 1조3항(군사분계선 상공 비행금지구역)의 효력을 정지시켰다. 북한이 군사정찰위성 만리경 1호를 발사한 데 대한 대응이라고 하지만, 그동안 9.19합의를 문재인 정부의 “북한의 선의에 기대는 가짜 평화”의 대표적 조치로 비난해온 윤석열 정부의 숙원 사업이며 보수 유권자를 겨냥한 국내 정치용 카드다. 북한도 곧바로 합의 전면 중지를 선언했다. 바람이 북을 향해 부는 봄, 대북 전단지 살포 등을 둘러싸고 남북간 군사적 충돌이 벌어질 위험이 극도로 높아졌다.
윤석열 정부는 ‘강력한 한미동맹’을 근거로 ‘힘에 의한 평화’를 보여주겠다며 남북 충돌도 불사하겠다는 태도다. 신원식 국방장관은 전군 주요지휘관 회의에서 “북한이 평화를 해치는 망동을 한다면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파멸의 지옥뿐”이라고 했다. 15일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핵협의그룹(NCG) 2차회의에서 한미는 북한 핵·미사일 위협에 대응해 내년 8월 한미 ‘을지 자유의 방패’(UFS) 연합훈련 때 최초로 핵 작전 연습을 하기로 했다. 북한의 핵 공격에 대응해 미국이 핵 보복을 가하는 시나리오를 한미가 처음으로 함께 연습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윤석열 정부는 미국의 힘을 빌리면 비무장지대에서 충돌이 벌어져도 북한이 감히 확전시키지 못할 것으로 단정하고 있고, 북핵·미사일 위기도 미국의 확장억제(핵우산) 강화로 대응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하지만, 미국의 힘을 빌리는 것만으로 지금 한국이 처한 엄중한 상황을 해결할 수 있다고 판단한다면, 매우 심각한 오판이다. 우선 내년 11월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당선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재집권하면 북한의 핵 보유를 용인한 채 핵 폭탄을 더는 만들지는 않는(핵 동결) 대가로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협상을 고려하고 있다고 미국 언론 <폴리티코>가 지난주 보도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보도를 부인하기는 했지만, 2019년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에서 이미 비슷한 합의를 하려 한 적이 있다. 트럼프는 지지층에게 그럴싸하게 내놓을 수 있는 만큼만 북한으로부터 받아낼 수 있다면, 한국의 뜻을 무시하고 무슨 합의든 할 가능성이 있다.
물론 미국 대선 결과를 지금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런데, 전문가들은 바이든 대통령도 2기 임기에선 북한과의 협상에 좀더 적극적으로 나설 것으로 본다. 워싱턴에서도 북한의 급속한 핵·미사일 증강, 북-러 군사 협력을 계속 방치하는 것이 미국에게도 위협 요인이라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난 몇년 동안 핵·미사일에 대규모 투자를 한 북한은 제재 완화 정도로는 협상에 응하지 않을 것이다. 한미 군사훈련 중단, 미군의 일부 철수 등을 요구할 것이다. 한국이 북핵 외교에 대해서도 미리 준비하고 미국과 계속 협의해야 하는 이유다.
바이든 행정부는 한미일 협력 강화로 중국 견제망을 만드는 데 윤석열 대통령의 ‘과거사를 제쳐둔 한일관계 개선’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가 남북관계에서 계속 충돌 불사의 자세로 나아간다면 그를 ‘제2의 네타냐후 악몽’으로 여기게 될 것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침공 등 여러 전선을 마주하고 있는 미국은 한반도에서 또 하나의 충돌이 벌어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이미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의 극단적 강경 정책이 가자지구에서 대규모 학살과 재난을 일으키면서 미국의 국제질서 구상에도 큰 부담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의 강경 보수에 대해서도 지금과는 다른 평가를 하게 될 것이다.
윤석열 정부는 미국과 ‘핵협의 그룹’으로 핵우산을 강화하는 데 몰두하고 있지만, 핵 무기 사용 여부의 결정은 전적으로 미국 대통령에게 달려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미국 내에서는 더이상 해외에 개입하지 말자는 고립주의 목소리가 계속 확산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이 한국과 미국을 동시에 핵으로 위협할 때, 미국 정부가 미국인들의 목숨을 희생시키면서 한국을 위해 핵우산을 펼칠 것이라고 100% 확신하는 것은 무모하다.
결국 한국은 북한의 핵 위협에 대응한 억지력 강화와 함께, 긴장을 최대한 낮추면서 더 이상의 상황 악화를 막기 위한 복합적인 전략이 필요하다. 대통령과 외교 안보 책임자들은 과도한 강경 정책에서 물러서야 한다. 북-러의 군사 협력을 견제하려면 중국과의 외교에 좀 더 진지하게 노력해야 하고, 러시아가 북한에 대해 더는 밀착하지 않도록 관리할 필요가 있다.
세계박람회 유치 실패는 119대 29의 참패보다, 누구나 사우디의 압승을 예상했는데도 대통령은 현실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잘못된 보고 체계, 과잉 자신감과 오판으로 외교력을 낭비한 과정 자체가 큰 경고음을 울렸다. 북핵과 안보에서도 이런 식이라면, 한반도의 평화와 수많은 이들의 목숨까지 위태로워질 것이다.
minggu@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