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인생의 어느 한시기도 홀로 자립해 지낼 수 없고, 평생 타인에게 의존하며 살아간다. 상호의존의 끝없는 연쇄를 통해 사회가 구축되며, 만약 이 사슬 중 어느 한 고리라도 녹슬면 모든 사회 구성원의 삶이 흔들린다. 게티이미지뱅크
장석준 | 출판&연구집단 산현재 기획위원
해마다 이맘때면 여기저기서 한해를 떠들썩하게 했던 말들을 돌아보곤 한다. 올해는 기억에 남는 말로 대개 ‘공산전체주의’나 ‘대장동’을 꼽지 않을까. 이것이 2023년 한국의 가난한 풍경이다.
그러나 바깥세상은 다르다. 올해 널리 회자한 말 중에 ‘돌봄’(care)이 있다. 5월 세계보건기구(WHO)가 마침내 코로나19 비상사태를 해제하자, 지구 곳곳에서는 이 뼈아픈 경험이 남긴 교훈으로 ‘돌봄’에 주목하는 토론이 시작됐다.
‘돌봄’은 흔히 어린이나 노인, 병자나 장애인을 돌보는 사회서비스를 가리킨다. 달리 말하면, 이런 인구집단에 속하지 않은 이들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그러나 팬데믹을 겪으며 우리는 또 다른 진실과 마주했다. 역병의 위협 앞에서 우리는 너나없이 돌봄의 손길을 간절히 원했다. 노약자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그러했다. 게다가 평소에 익숙했던 일상이 방역조치로 중단되자, 재난 이전의 우리 삶 역시 누군가가 제공하는 돌봄에 의존하고 있었음이 선명히 드러났다. 우리는 서로 돌보고 돌봄 받는 존재였음에도 이를 망각하며 살아왔다.
이 진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이제는 인간을 달리 바라봐야 한다. 그동안 우리는 인간이 ‘자립’하는 존재라 배워왔다. 두 다리로 홀로 서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가장 기본적인 성취이며, 따라서 두 다리로 설 수 없는 인간만이 타인에게 의지한다고 믿었다. 이 인간관에 따라 자본주의 산업사회는 ‘성공’을 부르짖고 ‘노동’을 규정했다. 개인에게 끊임없는 ‘자기계발’을 요구하는 신자유주의는 그 최신 버전이다.
그러나 의식하든 못하든 돌봄의 그물망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자립’보다 더 어울리는 말이 있다. ‘상호의존’이다. 우리는 인생의 어느 한시기도 홀로 자립해 지낼 수 없고, 평생 타인에게 의존하며 살아간다. 상호의존의 끝없는 연쇄를 통해 사회가 구축되며, 만약 이 사슬 중 어느 한 고리라도 녹슬면 모든 사회 구성원의 삶이 흔들린다.
이런 깨달음은 신자유주의 대두 이전 미덕이었던 ‘연대’의 귀환이라고 할 수 있다. 예전보다 더 생생한 인간과 생명의 자태로 돌아온 ‘연대’가 바로 오늘날 ‘돌봄’이라 불리는 지향이자 가치다. 그래서 지금 세계 곳곳에서는 ‘돌봄’을 새로운 기준점 삼아 신자유주의 이후 세상을 열어가려는 모색이나 제안이 분출하고 있다.
현금을 지원하는 ‘보편적 기본소득’ 구상 대신 돌봄 활동을 무상 공공서비스 형태로 지원하는 ‘보편적 기본서비스’ 방안을 들고나오는 이들이 있다. 또 어떤 이들은 이에 더해, 모든 노동자가 전일제가 아닌 시간제로 일하게 될 정도로 노동시간을 대폭 단축하고 그만큼 새로 확보된 여유시간을 돌봄 활동에 쏟자고 제안한다. 그런가 하면 기후재난으로부터 뭇 생명을 지키는 활동과 기후위기를 조금이라도 완화하려는 활동을 생명과 지구에 대한 ‘돌봄’으로 아울러 바라보려는 노력도 있다.
어떤 제안이든 결국은 더 많은 자본축적이나 더 강한 군사력 확보보다 ‘돌봄’을 소중히 여기는 사회를 지향한다. 어쩌면 유토피아의 복귀다. 단, 이번에는 어슐러 르 귄의 소설 ‘빼앗긴 자들’이 그리는 것처럼, 뭇 생명을 관통하는 고통에 대한 보편적 연민(혹은 자애)에 뿌리내린 유토피아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지금 한국 사회에 더없이 필요하지만 아직은 우리 가슴에 박히지 못한 화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