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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40년 묵은 독재자의 망령, 칠레는 언제쯤 벗어날 수 있을까

등록 2023-12-30 09:00수정 2023-12-30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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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7일(현지시각) 칠레 산티아고 시민들이 부결된 개헌 국민투표 결과를 확인한 뒤 환호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
지난 17일(현지시각) 칠레 산티아고 시민들이 부결된 개헌 국민투표 결과를 확인한 뒤 환호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

40여년 전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독재 시절 제정된 헌법을 폐기하고 21세기에 맞는 새로운 헌법을 채택하려던 칠레의 개헌 노력이 끝내 좌절됐다. 지난해 9월 첫번째 개헌안에 이어 지난 17일(현지시각) 두번째 개헌안도 잇따른 국민투표에서 국민 동의를 얻는 데 실패하면서, 칠레는 더는 개헌을 추진할 동력을 잃어버린 것으로 보인다. 가브리엘 보리치 대통령도 임기를 마치는 2026년 3월까지 “더는 세번째 개헌을 추진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번 칠레의 개헌 무산은 정치적으로 분열된 사회에서 새로운 사회 규범과 틀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를 만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잘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로 풀이된다.

애초 칠레의 개헌 운동은 4년 전인 2019년 10월 산티아고 지하철 요금 인상에서 촉발된 구조적인 사회 불평등에 대한 대규모 항의 시위를 계기로 시작됐다. 칠레는 1990년대 들어 민주화 시대를 연 지 30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피노체트 독재 시대의 헌법을 유지하고 있었다. 곧 전국민적 개혁 열기 속에서 새로운 민주 헌법을 마련하자는 여론이 크게 힘을 얻었고, 이듬해인 2020년 10월 국민투표에서는 78.3%가 개헌 추진에 찬성했다.

이렇게 해서 진보 성향의 인사들이 주도하는 제헌의회가 꾸려졌다. 이들은 몇달간 논의를 거친 끝에 국민의 사회권 신장, 원주민의 권리 보호, 양성평등 의무화, 동물 생명권 보장 등 진보적 의제가 듬뿍 담긴 헌법 개정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개헌안은 지난해 9월 국민투표에서 국민 61.9%의 반대로 부결됐다. 개헌안 내용이 일반 국민이 부담 없이 받아들이기엔 지나치게 앞서 나갔다는 평가였다.

그러자 이번엔 보수 인사들이 주도하는 제헌의회가 새로 구성됐다. 이들은 1차 개헌안에 담겼던 진보적 의제를 대부분 삭제하고 시장 친화적인 신자유주의를 비롯한 여러 보수적 의제가 대거 채택된 새 개헌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번엔 현행 피노체트 헌법보다 더 보수적으로 후퇴했다는 혹평이 이어졌다. 특히 ‘태아 생명 보호’ 조항은 여성의 임신중지권을 전면 금지하는 법적 근거가 될 수 있다며 크게 비판받았고, 재소자에게 가택 연금을 허용하는 조항은 피노체트 독재 시절 인권탄압으로 수감된 이들을 위한 것 아니냐는 의심을 샀다. 결국 두번째 개헌안도 17일 국민투표에서 55.8%의 반대로 부결됐다.

그렇게 3년에 걸친 칠레의 개헌 노력은 진보·보수 양극단을 오가다 끝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개헌 무산은 지난해 3월 국민의 개혁 열망을 안고 취임한 진보 성향의 보리치 대통령에겐 큰 정치적 타격이다. 헌법 개정의 완수는 보리치 대통령의 대선 핵심 공약이었다. 그래도 보수적인 두번째 개헌안의 통과를 막은 건 그나마 최악을 피한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보리치 대통령은 앞으로 필요한 정책 입안과 입법으로 국민들의 개혁 열망을 수용해 나가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그러나 경기 침체와 고질적인 치안 불안, 지지부진한 개혁 등으로 지지율 하락을 겪고 있는 보리치 대통령이 어디서 어떻게 국정 운영의 추진 동력을 길어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40여년 전 낡은 피노체트 헌법의 틀을 깰 수 없는 구조적 한계도 여전히 보리치 대통령을 옥죄는 족쇄가 될 가능성이 높다. 도대체 칠레는 언제쯤 피노체트의 망령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박병수 선임기자 su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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