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낙호 미디어연구가
2003년, 미국은 이라크를 침공했다. 이라크와 딱히 상관없던 대형 테러사건의 기억을 자극하여 자국민의 정서적 지지를 얻고, 검증되지도 않은 대량살상무기를 운운하며 이유를 만들었다. 이런 부당한 명분이 통용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당대 대중의 지배적 정서에 편승하느라 사실 확인 같은 것은 뭉개버린 대다수 주류 미디어의 적극적 협력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딱 그 열광만큼이나, 전쟁이 길어지고 부당함이 드러날수록 이라크전에 대한 미디어의 관심은 급속도로 식었다.
이런 흐름을 거스른 곳 가운데 하나가 <뉴욕 타임스>였다. 초기에는 대량살상무기 보도에 편승하여 체면을 구겼지만, 몇 년이 지나도 비싼 유지비용이 드는 바그다드 출장소를 고수했다. 불황 속에 전체 직원의 8%를 감원했던 2008년에도 계속 자국 독자들이 외면하기 좋은, 암울한 전쟁 속 미국의 잘못된 역할 수행 관련 보도에 소중한 지면을 할애했다. 침공 당시 79%의 지지를 보였던 여론이 5년여 뒤 64%가 “전쟁할 가치가 없었다”고 말하는 쪽으로(03년 , 08년 조사) 바뀐 배경에는, 이런 끈질긴 이슈 지속 노력이 있었다.
문제적 사안은 종종 오래 지속되며, 지속될수록 더욱 상황이 힘들어진다. 노동자 파업에서 노조 쪽이 지쳐 나가떨어지기를 바라며 사쪽이 협상을 질질 끄는 의도적인 것이든, 그저 팽팽한 교착 때문이든 말이다.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은 여러 정권에 걸쳐 크레인에 올라가 장기 고공농성을 벌여야 했으며, 콜트/콜텍 기타 노동자들 역시 해고 상태에서 오랫동안 여러 소송 속에 엇갈린 판결들을 받았다. 정권 친화적 방송을 강제하는 사장단에 반대하며 올해 문화방송(MBC) 노조가 파업을 벌였을 때 그 기간은 반년을 넘었다. 법원의 복직 판결에 불복한 사쪽에 항의하며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철탑에 올라간 것도 3주를 넘었다. 쌍용차 사태는 따로 말할 필요조차 없다.
그런데 사안이 길어질수록 관심은 그렇지 못하다. 우리들의 관심이라는 것은 무슨 형이상학적 개념이 아닌, 뇌 활동이라는 유한한 자원이다. 한쪽에 할애하면 다른 쪽에 못 쓰는데다가, 지속에는 에너지가 든다. 사안의 해결 과정에서 어떤 돌파구가 나왔을 때, 최종적 해결까지 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매듭지어졌다는 안도감을 얻고 급격히 식어버리는 경우도 생긴다. 문제적 사안이 길어질수록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한데, 반대로 그 관심을 모으기는 점점 더 힘들다.
이런 지점에서 언론의 사회적 역할, 즉 사회가 언론에 규범으로서 요구하고 산업적 인센티브로 유도해 내야 할 기능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언론이란 간판은 내걸었으나 그냥 기업 역할(“돈 많이 벌자”)이나 정치행위자 역할(“줄 잘 서자”)에만 몰입하는 자들은 논외로 하고, ‘권력에 대한 감시견’ 같은 거시적 규범보다 한 단계 구체적 층위로 내려오면, 언론의 사회적 역할은 바로 이슈 지속이라고 생각한다.
장기화된 노동투쟁 등 중요한 사회적 갈등을 담아내고 있지만 단지 오래돼 관심이 식고 있는 사안들을, 끈질기게 보도하며 지금 어디까지 왔는지 현황판을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 새로 관심을 가지게 된 이들이 이전에 축적된 기록들을 쉽고 간편하게 모아 참조할 수 있게 만들며, 나아가 적절한 타이밍으로 화제성을 재점화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매번 새로운 소재로 충격을 던지며 화제를 끄는 것보다는 덜 신나겠지만, 좀더 쓸만한 세상이 되는 데는 도움이 될 것 같다.
김낙호 미디어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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