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수 심리기획자
텔레비전을 통해 본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의 한 풍경은 당혹스럽다. 당선인은 말하고 모든 인수위원들은 거의 속기사 수준으로 그걸 받아 적고 있다. 연령이나 직책에 상관없다. 일사불란하다. 분과별 토론회에서 박근혜 당선인이 한번에 쏟아내는 발언의 양은 16절지로 10장쯤이라는데 그걸 죄다 받아 적는 것처럼 보인다. 고개 한번 제대로 들 새도 없는 게 당연하다. 나중에 동영상을 확인하거나 기록물을 보면 다 알 수 있는데 한국어 검정시험이라도 보는 것처럼 왜 그렇게 미친 듯 적고 있는지 의아하다.
대통령 후보 시절과 당선인의 발언에 대한 반응이 전혀 다른 게, 예우 차원일 수 있다는 항변은 옹색하다. 상황에 압도되고 권위에 짓눌린 하나의 권위주의적 행태일 따름이다. 그건 당선인의 경호나 의전이 후보 시절과 다른 것과는 차원이 별개인 문제다. 당선인의 말에 머리 조아리듯 일사불란하게 반응한다고 내용이 더 실해지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개인적으로 이번 인수위원 중에서 관련 분야에 대한 지식의 폭이나 합리적 태도에 끌려 기대가 많은 세 명의 인물이 있다. 그런데 그들도 예외 없이 당선인의 말을 초등학생처럼 적고 있는 광경을 보며 괜히 나 혼자 부끄러웠고 권위주의적 상황에 압도되는 무리의 일사불란함에 전율했다. 그런 광경이 제3자에게 어떤 식으로 보일지에 대한 성찰조차 작동하지 않는 상황은 심히 우려스럽다.
오래전 고위 임원들의 조인트를 까면서 훈시하는 회장의 녹음파일을 신입사원 교육용으로 쓴 기업이 있었다. 엽기적 상황이지만 그게 외부로 유출되어도 개의치 않았단다. 외려 자기네 회장의 권위와 카리스마를 과시하는 좋은 기회로 생각했다나. 이런 수직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리더십이 활개치는 세상에서 소통 운운하는 건 사치다. 결국엔 폭력적인 방법으로 자기네 보스의 권위를 모든 사람에게 강요하는 일도 일상적이 된다.
담뱃불을 붙이다가 대통령을 놀라게 했다고, 대통령에게 반말했다고 장관을 불러다 두들겨 팬 유신시절의 조폭 행동대장 같은 경호실장이 괜히 나오지 않는다.
얼마 전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서 개콘 출연진에게 내린 행정지도 처분은 그런 점에서 더없이 불길하다. 박근혜 당선인에게 훈계조 반말을 했다는 게 징계의 이유인데, 아직 국정을 시작하지도 않은 대통령 당선인에게 훈계조로 발언한 것은 바람직한 정치풍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청와대 경호실에서 심기경호 기능을 방통심의위에 이관한 줄 알았다. 이런 심기경호대를 자처하는 조직이 도처에서 나올까봐 걱정이다. 청와대 경호실을 장관급으로 격상한 것이 시대착오적이란 세간의 우려가 단지 기우였음을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은 박근혜 당선인 본인밖에 없다.
리더의 위대함을 찬양하거나 탄신을 축하하는 따위의 매스게임을 위해서 수만명 동원쯤은 당연하게 생각하거나 그런 사실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을 불순분자로 간주하는 사회에서 한 개인이 자기의 존엄성을 유지하면서 살기는 어렵다. 권위주의 제1의 폐해는 그것이 한 개별적 인간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토양을 철저하게 부정한다는 데 있다.
지난 대선 기간 중 박근혜 후보의 시장 방문 프로젝트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후보가 시장을 방문하기 전 미리 상인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탐방이 끝나고 후보가 돌아가면 실행팀들이 시장을 쭉 돌면서 장사를 못한 그만큼 물건을 구매해 주었단다. 적당한 긴장관계와 상대에 대한 배려가 살아있다는 느낌이다. 거기에 권위주의는 손톱만큼도 없다. 대통령이 되었다고 그러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는 떠받들어야 할 신이나 세습 왕족을 뽑은 게 아니라 국민을 대표한다는 대통령을 선출했을 뿐이다.
이명수 심리기획자, 트위터 @mepr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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