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기획자 영화 <아이 캔 스피크>에서 가장 속절없이 무너졌던 대목은 옥분 할머니가 엄마 무덤 앞에서 ‘엄마, 그때 나한테 왜 그랬어?’ 오열하는 장면이었다. 같은 마음이었는지 내가 영화를 본 두 곳의 극장에선 다 비슷한 반응이었다. 위안부로 끌려가 그토록 모진 일을 당하고 왔는데 남들한테 욕먹을까봐 남동생 앞길을 막을까봐 평생 숨기고 살라는 엄마의 당부는 소녀 옥분에게 녹슨 칼날이 가슴에 박히는 고통이었을 것이다. 내 새끼 욕봤다고 한마디만 해주지(그래도 옥분의 고통이 다 사라지진 않는다), 가족도 부끄럽게 여기고 버리는데 어떻게 스스로를 감당하면서 살 수 있었겠느냐는 늙은 옥분의 나직한 절규는 아득하게 슬프다. 지옥의 고통 속에 있는데 네 고통은 잘못된 것이니 죽어도 발설하지 말라는 말을 듣게 된다면 어떻게 견디나. 옥분이 엄마에게 하는 원망 같지만 실제론 그런 상처를 보듬어주지 못한 이 사회에 대한 서운함의 우회적 표현이라는 작중 의도와 영화평은 대체로 맞는다. 하지만 내게는 그 말이 상처와 치유에 관한 거대담론으로만 느껴진다. 이런 때 우선해야 할 것은 거대담론이 아니라 상처받은 이에게 개별적으로 눈길을 포개는 일이다. 극단의 트라우마를 겪은 이들은 거의 허물어진다. 하지만 사람을 결정적으로 무릎 꿇게 하는 것은 1차 트라우마가 아니라 그후에 진행된 2차 트라우마다. 옥분이 위안부로 끌려간 것은 1차 트라우마다. 엄마로부터 그 일에 대해 평생 입 다물고 살라는 말을 들은 건 2차 트라우마다. 지옥에서 간신히 살아 돌아온 옥분을 다시 지옥으로 밀어넣은 행위다. 광주 5·18 피해자들은 중무장한 자국 군인들에게 살육당했다. 1차 트라우마다. 그럼에도 그후 오랜 세월 빨갱이 폭도 취급을 받았다. 결정적 2차 트라우마다. 광주 5·18 피해자의 자살률이 대한민국 평균 자살률의 오백 배에 달하는 것은 그런 이유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자식이 수장되는 광경을 목도했다. 지옥의 고통이다. 더 끔찍한 일은 그후에 일어났다. 돈에 눈먼 사람으로 몰았고 이 사회의 안녕을 저해하는 민폐덩어리로 취급했다. 어느 노시인의 표현처럼 세월호 사건이 세계사에 없던 슬픔과 고통이 된 것은 그 기이한 2차 트라우마 때문이다. 2차 트라우마는 확인사살이다. 겨우 살아남았는데 목숨이 붙어 있는 걸 확인하고 완전히 죽이는 행위다. 진짜 죽음이다. 벼락 같은 고통을 당한 이 앞에서 고통당한 ‘나’가 아니라 그 옆의 ‘우리’를 언급하는 모든 언설은 틀렸다. 숨쉬기조차 어려운 가족구성원에게 가족 모두를 위해서 고통을 견디라는 말은 잔인한 동시에 어리석다. 그렇게 해봐야 가족 누구에게도 평화가 오지 않는다. 한 개별적 존재를 구하면 가족과 사회는 저절로 구해진다.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이 세상을 구하는 것이다. 결정적 한 방이란 승기를 잡는 필살기를 의미하지만 상대측 입장에서 보면 살벌한 위협이다. 고통 속에 빠진 이들에겐 확실하게 치명적이다. 몰라서 그랬든 가볍게 생각해서 그랬든 내 말 한마디가 치명적 위해를 가하는 결정적 한 방이 될 수도 있다. 이번 연휴에 나도 모르는 새 가까운 이에게 그런 결정적 한 방을 날린 건 아닐까 하는 데 생각이 미치면 아찔하다. 어떤 상황에서든 우리가 아니라 한 개인에게 주목하는 습관이 몸에 익어야 확인사살을 안 하며 살 수 있다. 우리 가족, 우리 학교, 우리나라 등 ‘우리’부터 먼저 들먹이는 일치고 잘되는 꼴을 못 봤다. 삶에서 결정적 한 방은 언제나 ‘나’다. 한 개별적 존재의 숨결에 주목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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