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걸 한림대 재무금융학과 객원교수
경제학의 역설적 이론 중에 ‘승자의 저주’라는 것이 있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지나치게 많은 비용을 치름으로써 승리하더라도 오히려 손해를 보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큰 위험에 빠지게 되는 상황을 말한다. 1950년대 멕시코만의 석유 시추권 공개입찰에 참여한 미국 석유회사들이 입찰가격을 높게 써내는 바람에 결국 막대한 손해를 본 경우가 많았는데, 이 사례를 연구한 정유사 기술자 세 명이 1971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이때의 상황을 ‘승자의 저주’라고 이름 붙임으로써 탄생한 개념이다.
이는 인수합병이나 입찰경쟁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으로서 ‘승자의 재앙’이라고도 한다. 경쟁이 심할수록 승자는 저주에 빠질 위험이 커지고, 또 더 큰 저주를 받을 위험이 있다. 왜냐하면 경쟁이 심할수록 이기기 위해 치러야 할 비용도 커지기 때문이다.
이 개념은 비단 경제·경영 분야뿐만 아니라 정치·외교·국방 등 입찰경쟁의 특성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다. 물론 선거도 예외는 아니다. 왜냐하면 선거라는 것도 결국은 유권자들의 표를 얻기 위한 입찰경쟁이기 때문이다. 선거가 치열할수록 후보자들은 유권자들의 표를 사기 위해 입찰가격을 높게 부르게 되고(즉, 더 강한 공약을 하게 되고), 그 결과 선거에서 이기더라도 지켜야 할 약속의 부담이 그만큼 더 커지는 법이다. 물론 약속을 지킨다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박근혜 대통령도 예외는 아니었다. 박빙의 승부에서 가까스로 이긴 선거이다 보니 온갖 공약을 남발하였고, 경제민주화·복지 등 일부 공약은 액면만 보면 과연 보수정당 후보가 맞나 의심이 갈 만큼, 민주당이 오히려 무색해할 정도였다.
사실 지난 대선 과정에서 박근혜 후보가 발표한 몇 가지 핵심 복지공약은 그의 복지철학에 비추어 볼 때 예상 밖의 강공책이었다. 예를 들면 65살 이상 ‘모든’ 노인에게 월 20만원씩 기초연금을 지급하겠다는 공약이나, 암·심혈관·뇌혈관·희귀난치성질환 등 4대 중증질환에 대해 국가가 ‘간병비를 포함해서 100% 부담’하겠다는 공약이 그것이다. 이 공약들은 국민의 입장에서 보면 대단히 고맙고, 그리고 우리나라가 하루빨리 복지국가로 나가야 한다는 차원에서도 매우 바람직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선별적 맞춤복지’의 틀에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정책들이었다.
이는 박 후보 자신이 망국론 운운하며 비난하던 경쟁 정당의 ‘보편적 복지’ 아닌가. 언론의 취재 후기들을 보면 그것은 대선 막판에 지지도가 빠지자 박 후보가 다급한 김에 깊은 검토 없이 발표한 것이고, 특히 4대 중증질환 간병비는 대선 토론에서 경쟁 후보에게 밀리자 엉겁결에 내뱉은 말이라는 주장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어쨌든 50대·60대 이상의 압도적 지지로 박 후보가 간신히 당선되었고, 그를 당선시킨 50대·60대 이상은 노인기초연금과 4대 중증질환 국가부담을 복지정책 우선순위 1, 2위로 꼽았다는 한 언론사의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이 공약들이 어떤 연유로 만들어졌든 박빙의 선거에서 박 후보의 당선에 결정적으로, 아니면 최소한 상당히 기여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출범도 하기 전부터 이런 공약들을 파기함으로써 말 바꾸기 논란에 휩싸였다. 노인기초연금, 4대 중증질환 국가부담 약속은 대폭 후퇴하였다. 경제민주화도 많이 희석되었다. 복지는 퍽치기당하고 경제민주화는 팽당했다고 생각하면 결국 국민들은 정권을 들치기당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겠는가.
승자의 배반으로 승자에게 돌아갈 저주가 그를 뽑아준 50·60대에게 돌아가고 있다. 박근혜 정부를 만든 50·60대여, 어찌할 것인가? 승자의 배반을 허용할 것인가? 박근혜 정부가 짊어져야 할 승자의 저주를 넓은 아량으로 대신 뒤집어쓰고 말 것인가?
승자의 배반이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승자에게 돌아갈 저주는 승자가 부담해야 선거에서 승자의 저주가 반복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그래야만 선거 과정에서 무책임한 공약 남발을 막을 수 있다. 우리 정치가 한 단계 더 선진화할 수 있다.
이동걸 한림대 재무금융학과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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