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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명수의 사람그물] 권위적 대상에게 무조건 복종하는 사회

등록 2013-05-20 19:15수정 2013-12-16 17:02

이명수 심리기획자
이명수 심리기획자
개인적으로 윤창중 성추문 사건에서 가장 절망스러웠던 대목은 홍보수석의 셀프사과다. 피해여성이 아니라 ‘대통령께 사과드립니다’란 문장은 청와대의 수준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주위에 아랑곳없이 두목만을 의식한 채 90도 인사를 하거나 걸핏하면 무릎을 꿇는 조폭집단의 행동규범이 청와대 고위공직자의 복무지침이 아닌가 잠깐 의심했다. 다른 사람에게 욕을 먹든 말든 자신의 안전과 안락을 보장받기 위해서 오로지 두목이란 존재만 염두에 두는 조폭집단의 행태와 무엇이 다른가.

조금 더 현실적으로 ‘라면 상무’ 사건에서 그 회사 홍보실이 자기네 회장님을 향한 사과문을 발표했다고 가정해 보자. 사람들의 분노와 어이없음이 어떨지는 안 봐도 비디오다. 내부 논의 과정 중에 회장님에 대한 셀프사과 의견이 나올 수도 있지만, 걸러져야 그나마 제대로 된 조직이다. 하지만 윤창중 사태에서 대한민국 청와대는 그런 제동장치나 현실감각이 송두리째 휘발된 집단처럼 느껴진다. 가장 큰 이유는 대통령이란 권위적 대상에 대해 절대적 몰입을 체질화한 고위공직자들의 태도에 있다.

권위적 대상이란 내게 강력한 심리적 영향력을 가진 존재로, 그 원형은 부모다. 아이에게 부모는 절대적 영향력을 가진다. 옳고 그름의 기준이 부모의 태도에 따라 결정된다. 어린 시절에는 부모가 권위적 대상이지만 그다음엔 삶의 시기에 따라 선생님이나 선배, 이성 친구, 윗사람 등으로 분할 이동한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나라에서는 권위적 대상이란 말이 복종해야 할 대상이라는 말과 똑같다. 권위적 대상을 역할로만 인식하고 시시비비를 따질 수 있어야 하는데 무조건적인 복종의 대상을 넘어 숭배의 대상으로 강요한다. 가족들에게 짐승 같은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이라도 아버지라는 이름이 붙으면 따르고 존경해야 한다고 세뇌한다. 반기를 들거나 이의를 제기하면 패륜으로 몬다. 권위적 대상과의 관계에선 합리적인 모든 의문과 거리 두기가 도륙의 수준으로 제압당한다.

그러다 보면 실제 특성과는 상관없이 부모니까, 윗사람이니까, 갑이니까, 돈이 많으니까 따위의 획일화된 편견의 틀로 권위적 대상을 인식할 수밖에 없다. 제대로 된 관계나 소통이 될 리 만무하다.

대통령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판단력이 뛰어난 사람이나 가장 인격이 훌륭한 사람이 아니다. 대통령으로서의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그렇게 배려하고 존중하는 자리일 따름이다. 하지만 대통령의 신임을 얻어 그 자리에 오래 있고 싶거나 더 좋은 자리를 노리는 고위공직자들에게 대통령이라는 권위적 대상의 아우라는 신에 가깝다. 권위적 대상 한 사람만 안중에 있으니 꼭 필요한 현실감각이나 인간에 대한 예의 같은 건 뒷전으로 밀린다.

윤창중 사태에서 홍보수석은 대통령께 사과하고, 민정수석은 귀국 지시가 법적으로 아무 하자가 없다며 여론을 질타하고, 외교부 수장은 정상회담의 성과를 앞세우며 외교문제로 비화할 게 없다고 나름의 희망사항을 피력한다. 권위적 대상에 대한 착시현상에서 비롯하는 헛발질이란 점에선 도긴개긴이다. ‘청와대가 중대 국가기관이 아닌 대통령 개인을 시중드는 내시부로 전락했음을 보여주는 참담한 상징’이라는 민주당의 논평조차 과해 보이지 않는다.

대통령이라는 권위적 대상에 대한 이 절대적이고 참담한 인식에 균열이 오지 않는 한 대한민국 국민들의 민망함과 절망은 무한반복될 게 뻔하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민주공화국의 시민이란 사실을 실감하고 사는 일이 지나칠 정도로 어렵다. 불행하고 피곤하다. 청와대가 먼저 국민행복 시대의 모범을 보여달라.

이명수 심리기획자, 트위터 @meprism

[관련영상] [한겨레캐스트 #98] ]청와대 출입기자가 본 '윤창중 성추행'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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