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걸 한림대 재무금융학과 객원교수
정부가 지난 8일 발표한 세법 개정안에 대해 닷새 만에 다시 수정안을 내놓았다. 중산층 봉급생활자의 반발에 대통령이 뒤늦게 놀랐던지 서둘러 “원점 재검토” 지시를 했고, 그다음 날로 정부·여당은 증세 부담 기준 급여액을 3450만원에서 5500만원으로 올리고 증세 부담 근로자 수를 434만명에서 205만명으로 줄였다. 애초보다 세 부담 증가액이 4400억원 감소한다고 한다. 급여액이 3450만원에서 5500만원 사이에 있는 봉급생활자 229만명은 1인당 평균 19만2000원의 세 부담 증가가 취소된 셈이다. 그나마 다행이다.
정부와 청와대는 애초 서민·중산층의 세 부담에 대해 ‘그까짓 19만2000원이야’ 하고 생각했던 것 같다. 대통령 경제수석이라는 중책을 맡은 자가 “거위에게 고통 없이 털을 뽑는 방식”으로 이번 세제 개편을 했다고 자랑했다 하니, 루이 14세 방식으로 국민들을 속여서라도 세금만 더 걷으면 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자기 배가 부르면 남 배고픈 건 모른다고, 가뜩이나 얄팍해진 중산층의 지갑을 몰랐던 모양인데 이 돈을 절대 우습게 보아서는 안 된다.
지금 우리 서민·중산층 대다수가 가계 부채에 허덕이고 있고 소득이 장기간 정체되면서 자녀들 학자금이다, 대출이자다, 또는 부족한 생활비다 해서 최근 몇 년 사이 생계형 가계 부채가 부쩍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현재 우리 중산층 봉급생활자들 중에 저축 여력이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고, 특히 3450만~5500만원의 봉급생활자라면 대부분 자녀 한두명을 둔, 한창 생활비가 많이 들 중년층들일 텐데 이들이 여유가 있겠는가. 늘어난 세금 부담 때문에 이들 서민·중산층의 가계 부채가 매년 2000억~3000억원씩 더 늘어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라. 언제 터질지 모르는 가계 부채 문제를 생각하면 이는 결코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가랑비에 속옷 젖고, 털 뽑힌 거위는 고통도 못 느끼면서 서서히 죽어갈 수도 있는데 그런 고통 따위는 염두에 없었던 게다. 이명박 정부 때 부자 감세로 줄여준 세금이 매년 20조원을 훨씬 넘고 또 재벌에 대한 각종 세금 감면만 해도 십수조원에 이르는데 이를 조금만 철회해도 서민·중산층 부담을 늘리지 않고도 복지 재원을 확보할 수 있지 않은가. 대통령과 측근 고위 관료, 그리고 집권 여당이 서민·중산층과 가계 부채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이다지 안일하다니 걱정이다.
또 형식이야 어찌되었건 세금을 더 내면 증세지 무엇인가. 그런데 경제수석이란 사람이 궤변 같은 말장난을 해대면서 증세가 아니라고 억지를 쓰는 것을 보면 이명박의 범법 행위 가능성에 대해 “주어가 없지 않으냐”고 발뺌하던 새누리당의 뻔뻔스러운 전통을 박근혜 정부도 그대로 물려받은 것 같다. 도대체 이 정부에 상식이라는 것이 남아 있나 걱정된다.
막판에 우리 대통령께서 구원투수로 등판하셔서 “원론적인 수준의 말”만 하면서 마치 자기 말 한마디로 모든 일을 말끔히 처리하는 모양새를 보이는 것도 벌써 여러번 반복해서 보다 보니 걱정이 된다. 애당초 경제부총리가 세법 개정안을 발표했을 때 당연히 대통령께 보고하고 재가를 받았을 테고, 경제수석이 언론에 나서서 당초 안을 그렇게 강변했을 때도 대통령 뜻을 받들어 했을 것 아닌가. 그런데 일이 시끄러워지니 마치 자기는 책임이 전혀 없고 모든 것은 자신을 잘 보필하지 못한 신하들 책임인 듯 질책이나 하시는 것을 보면서 우리 대통령께서는 혹시 자신을 베르사유궁 안쪽 깊숙이 계신 절대군주 루이 14세라고 생각하시고, 자신은 뒤에서 거위털이나 뽑으면 된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모든 책임은 충직한 신하들이 지면 되니까. 윤창중 사건이 나면서 청와대와 정부 관료들이 국민들은 안중에도 없이 앞다퉈 대통령께 백배사죄부터 해대던 것을 보지 않았던가.
박근혜 정부와 집권 새누리당한테 국민들은 안 보이고 대통령만 보인다면 이런 황당한 일은 반복될 것이다. 대통령이 고위 관료와 집권 여당의 방패 뒤에 숨어 있는 한 이런 일은 또 일어날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무너지는 거야 상관할 일이 아니지만 죽어나는 것은 우리 경제, 우리 국민들이니 문제다.
이동걸 한림대 재무금융학과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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