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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상 읽기] 보급형 민주주의 / 장덕진

등록 2013-10-20 19:09수정 2013-10-21 10:32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지난 9월 총선에서 승리함으로써 세 번 연달아 집권에 성공한 독일의 기민당이 사민당과 대연정을 하게 될 것 같다는 소식이다. 만약 새누리당이 2016년 총선과 2017년 대선에서 또다시 승리한다면 세 번 연달아 집권하는 셈이 되는데, 그 상황에서 갑자기 민주당과 연정을 하겠다는 이야기와 비슷하다. 쟁취하고 휘두르는 권력에 익숙한 대다수 한국인에게 선거의 승자가 연정을 제안하는 것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 일이다.

나는 유신 시절에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그때에도 민주주의는 소중한 것이라 배웠던 것 같다. 물론 거기에는 ‘한국식’이란 수식어가 붙었다. 그런데 어린 마음에도 잘 이해되지 않았던 것은 그렇게도 소중하다는 민주주의가 실생활에 적용되는 것은 다수결밖에 없다는 점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열리는 학급회의에서 청소당번을 어떻게 정할 것인지, 수업시간에 떠드는 친구의 이름을 게시판에 붙여놓을 것인지 말 것인지, 이런 문제들을 놓고 다수결로 결정했다. 어린 내게조차 학급회의에서 진지하게 논의되는 의제들이란 한없이 사소했다.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쪽이 원하는 방향으로 결정되고 나면 소수는 ‘다수결 원칙’에 따라야 했다. 하지만 열 살짜리 초등학생들에게조차 때때로 가해지는 언어폭력이나 심지어 물리적 폭력과 같은 것들은 한 번도 회의에서 논의된 적이 없다. 비록 가끔씩 얻어맞을지언정 우리는 표결을 했고 다수결 원칙에 따랐으므로 나름의 한국식 민주주의를 실천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래서인지 우리가 기억하는 민주주의는 다수결 원칙 하나뿐이다.

민주주의는 곧 다수결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 독일의 대연정 소식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당연하다. 다수결에서 이겼는데 연정 따위가 왜 필요하단 말인가. 한국에서 무능한 야당을 질타하는 목소리가 높고 나 또한 공감하지만, 나는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새누리당의 위기가 더 근본적이라고 생각한다. 범접하기 어려운 카리스마의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새누리당은 정치집단으로서의 기능을 크게 상실하고 정당이라기보다는 경호집단 같은 역할로 스스로를 국한시키고 있으며, 대통령은 새누리당이 몸을 던져 만들어준 탈정치의 공간에서 통치행위만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가장 자주 동원되는 논리가 다수결이다.

사례는 수없이 많지만 국정원을 비롯한 주요 국가기관들의 대선 개입 사건 하나만 예로 들어보자. 민주당은 처음부터 대선 무효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양해를 구하고’ 투쟁을 시작했다. 새누리당의 반응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일관되다. 대선 무효를 주장하는 것이냐는 한마디뿐이다. 민주당은 대선 무효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설명을 수백번은 반복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새누리당은 같은 질문을 반복한다. “대선 무효를 주장하는 것인가?” 난청인가? 난독인가? 그럴 리 없다. 다수결 논리에 기대어 대통령의 통치공간을 억지로 지켜내려는 것이다. 그러려니 정치가 실종되고, 정치가 없으니 정당이 스스로 자신의 존립 이유를 부정하게 되며, 나아가 민주주의라는 집에서 다수결이라는 기둥 하나만 달랑 남겨놓았다.

독일 기민당이 세 번이나 연달아 다수결에서 이기고도 사민당과 연정을 하려는 이유는 소모적인 정치적 대립을 피하고 합의 아래 정책의 연속성을 이어가기 위해서라고 알려졌다. 우리 국회에서 최대 의원모임이 독일 배우기 모임이라고 한다. 이 모임에는 새누리당 의원 중 무려 3분의 1이 가입해 있단다. 이분들은 독일에서 무엇을 배우고 있는 걸까. 독일 민주주의에서 합의도 정책도 빼버리고, 한국에 적용할 보급형 민주주의라도 들여올 참인가.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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