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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유레카] 기억하지 말아주오 / 구본권

등록 2013-10-23 18:51수정 2013-10-24 10:34

잠시 존재하는 것을 영유하고픈 바람은 간절했다. ‘멈추고 싶은 순간’이라는 표현이 시간의 속성을 말해준다. 파우스트가 젊음을 다시 누린 대가로 악마에게 영혼을 넘겨주는 조건도 “시간아 멈추어라”라고 말하는 순간이다. 기술 발달은 찰나를 간직하고 싶어하는 인간의 오랜 꿈을 실현시켰다. 결혼식, 아이 웃음, 졸업식, 고대해온 만남은 기록의 순간이 됐고, 이제는 사진을 위한 행사가 됐을 정도다.

기록과 보존이 수월해진 디지털 세상에서 기록 대신 망각이 사업모델로 떠오르고 있다. 최근 국내에 선보인 사회관계망서비스 프랭클리는 메시지를 확인한 지 10초가 지나면 대화상대 창에서 내용이 자동삭제된다. 삭제되면 회사 서버에서도 복구할 수 없다. 집단채팅에서 누군가 대화 내용을 저장하면 모두에게 그 사실이 통보된다. 대화 쌍방과 서비스 업체가 각각 대화록을 저장하고 있어 ‘내용증명 대화’로 기능을 해온 카카오톡 같은 채팅앱 대신 ‘자폭 메시지’로 대화하는 서비스다.

2011년 7월 미국에서 선보인 사진공유앱 스냅챗이 개척자다. 주고받은 사진이 즉시 삭제돼 흔적이 사라지는 기능을 이용해 은밀한 사진이 오갔고, 누드챗이란 별명을 얻었다. 페이스북도 2012년 유사 서비스 포크를 내놓았다. 2009년 빅토어 마이어쇤베르거가 <잊혀질 권리>에서 인터넷에선 망각이 어렵고 기억과 보존이 기본값이 됐다며, 정보에 유통기한을 설정하자고 제안했는데 이를 사업화한 서비스들이다.

사적 대화가 모두 기록된다는 두려움 없이 소통하려는 이용자 수요는 미국 국가안보국(NSA)의 무차별 도·감청 이후 더 높아지고 있다. 국내에선 프라이버시가 노출된 개인의 ‘잊혀질 권리’ 요구보다 국가기관이 공식 업무로 수행한 작업을 몰래 삭제하는 현실이 주목받고 있다. 국가정보원과 국군 사이버사령부 직원들이 조직적으로 트위터와 게시판에서 불법선거운동을 했다가 실태가 드러나자 뒤늦게 흔적을 지우고 있는 게 국가 안보조직의 초라한 민낯이다.

구본권 선임기자 starry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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