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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왜냐면] 박근혜 대통령, 국민의 침묵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 문학진

등록 2013-11-06 19:24수정 2013-11-07 13:43

박근혜 대통령이 10월24일 청와대 접견장에 입장하며 시계를 보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박근혜 대통령이 10월24일 청와대 접견장에 입장하며 시계를 보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박근혜 대통령에게 처음 편지를 씁니다.

저보다 두살 위니까 박 대통령이나 저나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동시대인이지요. 18대 국회의원 시절 같은 상임위에서 활동하던, ‘친박’이라 불리던 한나라당(지금 새누리당) 의원에게 사석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당신네 보스를 엘리베이터에서 가끔 보는데 사람 대하는 태도가 맘에 들더군. 젠체하지 않고 다소곳해. 보기에 좋아.”

의원회관 같은 층(5층)에 방이 있었기 때문에 저는 대통령과 가끔 조우했고, 실제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저는 그런 느낌이 대통령이 된 뒤에도 유효하기를 바랐습니다만 솔직히 이제 접어야겠고, 그래서 이 편지를 씁니다. 다소곳해 보이던 모습과 태도 뒤에 이런 비수가 숨어 있을 줄은 차마 몰랐습니다.

저는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이 휘두른 유신의 철퇴에 맞아 1975년 긴급조치 7호 위반으로 고려대에서 쫓겨났지만, 어쨌든 같은 시대를 겪은 박근혜 대통령이 유신으로 이처럼 완벽히 돌아가리라곤 생각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를 마음속으로 간직하는 거야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우리 시대를 생각하면 그 망령에서만큼은 벗어나야 하고, 새로운 프레임을 짜야 하는 것 아닙니까.

모든 것이 ‘아버지의 이름으로’ 가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생애 마지막 ‘작품’이었던 유신헌법의 기초를 만든 사람이 딸의 비서실장으로서 권력을 쥐락펴락하고, 그와 비슷한 연배의 아버지 추종자들이 딸을 에워싸고 이 나라를 들었다 놓았다 한다고 합니다. 이들은 아버지와 그 계승자들인 전두환·노태우 등과 더불어 우리 현대사에 어떤 족적을 남긴 사람들입니까. 독재와 지역감정에 편승해 이 나라를 정치적·정신적으로 절름발이 국가가 되게 한 일등공신들 아닙니까. 김대중·노무현을, 제가 보아서는 어느 구석도 불그레한 기운이 없건만 ‘친북’ 나아가 ‘종북’이라 몰아치는 데 앞장서온 사람들 아닙니까.

박근혜 대통령이 저와 같은 시대의 정치인으로서 이 케케묵은 틀에 갇혀버릴 줄은 몰랐습니다. 역사 왜곡은 역사 앞에 죄를 짓는 일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역사 앞에 죄인이 되고자 합니까. 친일과 독재를 옹호·미화하는 교과서를 만들어 우리 아이들에게 배우게 하면, 이 나라는 무슨 나라가 되는 것입니까.

얼마 전 제가 ‘독립운동과 친일파’라는 제목으로 강연회를 열었습니다. 독립기념관장을 지내신 김삼웅 선생이 강연을 하고 일문일답을 했는데, 중학생으로 보이는 한 학생이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독립운동가 중 누구를 가장 존경하십니까?” 김 선생은 잠시 멈칫하다가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지난달 일제와의 격전지였던 중국 타이항산에 갔었습니다. 그곳에는 항일무장투쟁을 하다 일본군의 흉탄에 맞아 숨진 독립운동가들이 묻혀 계십니다. 그분들의 이름을 우리는 일일이 기억하지 못합니다. 저는 그분들을 가장 존경합니다.”

잔악한 일제에 맞서 모든 것을 버린, 이름 석자도 역사에 제대로 기록돼 있지 않은 ‘무명용사’들이야말로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 아닙니까. 우리가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역사는 이런 ‘혼이 담긴 역사’인 것이지, 일제에 빌붙어 호의호식하고 그 기반을 가지고 대대로 잘 먹고 잘사는 ‘혼이 없는 역사’는 아니지 않습니까. ‘혼이 없는 역사’도 가르쳐야 합니다. 그것을 ‘그럴 수밖에 없었다’가 아니라 ‘이런 아픈 역사도 있었다’고 가르쳐야 하고, 이 역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그 이후의 역사도 사실 그대로 가르쳐야 합니다.

친일문제는 과거형이 아니라 엄연히 현재진행형입니다. 이 사회의 주류로 분류된 집단의 뿌리가 친일파에 닿아 있고, 일본의 우경화에 우리가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지를 놓고도 우리는 우리 내부에서 이 문제를 명쾌히 정리해야 합니다. 아버지가 일제 말기에 충성을 맹세하는 혈서를 쓰고 일본군 장교로 복무했기 때문에라도 친일을 왜곡·미화하는 집단과 손을 잡아서는 안 됩니다.

프랑스 등 유럽 여러 나라들이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에 부역한 자들에 대한 가혹한 처단을 통해 민족정기를 바로잡은 것이 드골 등 국가지도자들이 ‘빨갱이’여서 그랬습니까. 1948년 이승만 단독정부 수립 직후 친일파 처단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던 반민특위가 이승만에 의해 와해되면서 친일파 청산은 물 건너갔고, 친일파가 다시 살아났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려던 집단의 상당수가 ‘빨갱이’로 몰렸습니다. 이 피눈물 나는, 역사가 꼬이는 중심에 있던 인물이 이승만입니다. 이 사람을 거의 신격화하는 역사학자를 국사편찬위원장에 앉힌 박 대통령의 역사관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며칠 전 박정희 대통령 추모 예배가 어느 교회에서 열린 모양입니다. 웬 목사가 “우리나라에선 독재를 해도 됩니다”라고 설교했다 합니다. 박근혜 대통령 집권 이후 이 나라에서 이런 ‘타령’들이 늘어가고 있는 것이 눈에 뜨입니다. 대통령은 구름 위에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저는 초선 의원 때 의원총회에서 당시 노무현 대통령과 제가 속한 열린우리당과의 관계가 민주적이지 못한 점에 대해 “대통령이 신이냐”며 당의 맹성을 촉구한 적이 있습니다. 대통령은 신도 아니고 초월자도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박근혜 대통령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보았던 그 모습을 잃었고, 구름 위에 올라앉아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취임 8개월이 지났는데 그 흔한 기자회견 한번 안 하고 사과나 유감 표명도 비서실장이나 총리를 시켜 마지못해 합니다. 야당이 못나서 그런지는 몰라도 야당을 무시합니다. 그리고 옷이 몇벌 되는지는 몰라도 하루에도 몇번씩 갈아입고 밖으로 ‘세일즈 패션외교’ 하러 다니느라 바쁩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며칠 전 유럽 방문에 앞서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에 대해 철저히 진상 규명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수사 열심히 하던 검찰총장과 수사팀장을 찍어내고 나서 수사 열심히 하라고 하면 문맥이 통합니까. 앞뒤가 안 맞지요. 국민들은 조용한 가운데 지켜보고 있습니다.

국정원 대선개입이라는 전대미문의 소용돌이 속에서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 사건이 갑자기 터졌고 북방한계선(NLL) 논란이 불거졌습니다. 대통령 직속기관인 국정원이 정치 전반을 휘저었습니다. 요물 모습을 한 교과서가 등장했고, 전교조의 목을 짓누르고 있고, 기초연금은 탈바꿈했고, 밀양에서는 어르신들이 추위 속에 울부짖고 있습니다.

중요한 자리에는 대통령 지근거리에 있는 ‘노병’들의 입맛에 맞는 인사들이 끼리끼리 앉혀집니다. 대통령은 이 나라가 ‘전쟁을 경험한 땅’이기 때문에 그 약한 고리만 붙잡으면 무난할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국민의 겉으로 드러난 침묵이 ‘동의’라고 착각하는 것은 아닙니까. 국민의 침묵이 오래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오늘 아침 산에 올랐다가 꽤 비탈진 곳이어서 나무둥치 하나를 잡고 올라가려는데 뿌지직 소리를 내며 나무둥치가 문드러져 꺾이는 걸 보았습니다. 속이 썩어 있었습니다. 썩으면 끝입니다.

문학진 전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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