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 주요 집단의 현주소를 이토록 한꺼번에 확 드러낸 의제가 일찍이 있었던가? 새해 벽두를 뜨겁게 달군 연말정산 파동은 정부·여당은 물론 야권, 시민단체와 언론 등 대한민국 주요 정치·사회 행위자들의 맨얼굴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가면이 벗겨지고 화장이 지워진 모두의 본색은 비록 색깔은 제각기 다르고 농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보기에 딱했다는 점에선 똑같았다.
어쩌면 다시 언급하는 것조차 짜증날 일인지 모르겠지만, 이 ‘본색 탐색’이 우리 사회의 또다른 출발선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찬찬히 복기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가장 꼴사나운 모양새를 보인 쪽은 정부·여당이다. 나름 의미있는 세제 개편을 해놓고도 ‘증세 없는 복지’란 공약에 사로잡혀 그 실상을 솔직히 밝히지 않았다가 거짓말쟁이란 여론의 난타를 맞자, 재정 악화를 더 초래하는 보완대책을 세우는 또다른 악수를 두는 우를 범했다. 한마디로 기만과 안일, 무책임 외에 다른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이런 정부·여당의 실책에 이때다 싶어 집중공세를 펴는 야권의 모습도 미덥지 못했다. 세액공제 방식의 세제 개편은 결코 세금폭탄이라고 할 수 없다. 전문가들은 도리어 소득 재분배 강화 등 바람직한 면이 있다는 평가를 내렸다. 그런데 이런 면을 눈감거나 혹은 인정하면서도 “내 이럴 줄 알았지”라며 세금폭탄론에 편승하는 모습은 또다시 많은 이들을 실망케 했다. 이번 파동을 낳은 근거인 2013년 세제 개편안은 찬성 245, 반대 6, 기권 35로 국회 통과가 이뤄졌다. 그러니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터. 야권은 왜 이 마당에도 위선과 비겁이란 세평을 받는지를 자문해야 한다.
평소 중요 정책 사안마다 비판적 의제 제기자로서 역할을 해온 대표적 시민단체는 그해 세제 개편안이 국회를 통과했을 때, “아쉬움은 감출 수는 없지만 증세 없는 복지의 기조를 벗어나 합리적인 증세의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라고 평가했다. 그래서일까? 이 단체는 지금껏 논평 하나 내놓지 않고 ‘침묵’ 모드를 보이고 있다. 이 침묵이 혹 진보와 보수란 ‘진영논리’가 작동돼 사안을 제대로 응시하지 못하게 한 결과는 아닌가? 그저 노파심에 따른 오해이길 바란다. 이 파동을 틈타 증세 반대 서명운동에 나서는 한 단체의 어처구니없는 행태까지 이 지면을 통해 언급할 필요는 없는 듯하다.
이번 파동에서 가장 제 색깔을 드러낸, 아니 뚜렷이 밝힌 쪽은 보수언론이다. 이들은 갖은 실정에도 날을 벼리지 않았던 보수정부를 두고서, 무상보육과 기초연금 등 복지를 하다 “꼼수증세”의 작태를 벌여 “13월의 울화통”을 불러일으킨 “얼빠진 정부”라는 비난의 화살을 날렸다. 급기야 “증세 없는 복지, 환상을 깨자”며 “증세냐, 복지 축소냐…대통령이 결단을 내려야”라고 요구하더니 “선택적 복지로 바꾸면 재정부담 줄어”라는 결론으로 자신들의 복지관을 한껏 과시했다. 이번에도 대립항을 세워놓고 선택을 강요하는 마녀사냥식 담론구조를 여지없이 동원했는데, 기실 이들에게 문제의 근원은 증세 없는 복지라는 환상이 아니었다. 지금은 복지 확대, 그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다.
쓰다 보니 우리 사회의 주요 집단을 싸잡아 책잡은 모양새가 돼버렸지만 실은 이 말이 하고 싶었다. 적어도 세금에선 제각각 본색이 드러난 지금이야말로 진짜 세제개혁 논쟁을 벌일 적기라는 것이다. 가면을 벗고 화장을 지우고 서로의 민낯을 직시해야 제대로 싸울 수 있으며, 그래야 타협도 합의도 가능한 법이다. 복지와 세금의 고차 함수를 푸는 진짜 싸움은 어쩌면 지금부터다.
이창곤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장 겸 편집국 인사협력 부국장 goni@hani.co.kr
이창곤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장 겸 편집국 인사협력 부국장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