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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싱크탱크 시각] 어떤 숟가락 / 조계완

등록 2016-06-05 19:32



기술공고를 막 마친 김군은 ‘노동자’가 되었다. 숟가락과 컵라면이 든 작업가방을 메고 집을 나서면서부터 그는 더 이상 ‘청소년’일 수 없었다. 꿈·연애 그리고 펼쳐질 장래. 열아홉살은 얼마나 의미 있는 나이인가. 그날 구의역 사고로 이제 그는 초여름 밤에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을 다시는 느낄 수 없다. 가슴을 고동치게 하는, 무언가 또는 누군가와의 아름다운 연애를 할 수도 없다. 19살의 불우한 숙명이어야 하는가.

5월31일 낮, 서울 건국대병원 장례식장 옆길. 정치인과 취재기자 대부분 구의역 추모공간에 가 있던 시각, 여기서 열린 작은 추모집회에서 마이크를 잡은 민주노총 간부는 그를 ‘동지’라고 불렀으나 여전히 한 아이일 뿐이다. 김군의 동료로 일해왔던 한 아줌마 노동자는 “아이 부모는 컵라면만 보면 자식 생각에 가슴이 찢어질 것”이라고 울먹였다. 그러나 나는 신문에 실린 관련 사진에서 컵라면보다는, 그 위에 주인을 잃은 채 거꾸로 뒤집혀 놓인 쇠숟가락에 아프게 시선이 멈췄다. 그의 땀내 나는 작업복과 월급봉투에 대해, 때 묻지 않았을 꿈에 대해, 숟가락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뜨겁게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아마 그는 날마다 숟가락을 가방에 넣으며 무언가 용기와 소망을 담은 편지를 자신에게 발신했을 것이다. 숟가락은 팍팍하고 기진맥진한, 무엇보다도 불안한 노동의 생을 견뎌내는 하나의 ‘희망’ 같은 것이었을까. 어쩌면 그 소망이 애초에 불가능한 것임을 몇 달간 절망적으로 깨달으며 작업공구를 챙겼을지도 모른다. 못다 한 짧은 삶 앞에 그토록 슬픈 까닭이다.

한해 총 1464조원(2015년)의 가치를 생산해내는 취업자 2610만명(임금노동자 1940만명) 중 한명이었던 김군. 그 역시 우리의 삶을 영위하게 해주는 ‘생산’을 직접 담당하는 노동자였다. 수익과 하청의 이름 아래 ‘2인1조’가 무시된 위태로운 작업은, 생산 이전에 인간적 위엄과 존엄의 윤리적 요청이 포기된 것이나 다름없다. 평택 자동차공장, 거제 조선소…. 환란 이후 20여년, 곳곳에서 노동이 쓰러지는 소리를 세상은 진지하게 듣지 못했다. 정작 노동자 자신만이 공포와 울분에 찬 자기의 눈을 스스로 응시하며 쓰러져갔다. 전철이 플랫폼에 들어오는 순간 김군은 과연 무엇을 머릿속에 떠올렸을까.

우리 시대 노동의 생애에 벌어지고 있는, 노여움마저 일으키는 죽음의 풍경들은 심오한 사회과학적 통계분석과 논변을 기다리는 대상이 아니다. 숟가락이 은유하는 밥의 뜨거움에 대한 인간적 과제다. “얼마나 더 많은 귀를 가져야/ 타인들의 울음을 들을 수 있을까/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이 죽어야/ 너무 많이 죽었음을 깨닫게 될까”(미국 팝가수 밥 딜런). 이 노래의 대답은, 적어도 오늘 한국 사회에서 결코 “바람만이 알고 있지” 않다.

조계완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동향분석센터장
조계완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동향분석센터장
효율과 이윤을 신성시하는 경제·사회체제가 왜 극도로 비효율적이고 동시에 노동의 곤경과 발버둥치는 죽음을 불러일으키는가. 불행하게도 시대의 선상(線上)에 서서 그것에 대해 윤리적 열정과 지적 역량을 기울여 고투·저항해온 지식인은 드물었다. 그러는 사이 하청·외주는 단순히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의 힘으로 계속 확산되면서 오히려 점점 ‘정규적’인 것이 되었다. ‘명복을 빕니다’라고 꾹꾹 눌러 쓴 조의금 봉투를 건네는 내 등 뒤에서 황준식 은성피에스디(PSD) 노조위원장이 검게 그을린 눈을 글썽였다. “김군처럼 공고를 마친 22명의 막내 조합원들이 있어요. 숟가락을 가방에 넣고 다니는지 우리도 전혀 몰랐어요.”

조계완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동향분석센터장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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