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대만 군부가 항일전쟁 승리 70주년을 뜻깊게 맞이하고 있다. 대만 국방부가 지난 1월 초 발행한 ‘용사국혼달력’에 ‘순국영장’들을 열거하면서 중국 공산군의 쭤취안 장군을 포함시켰기 때문이다.
우리로 치면 항일투쟁에서 숨진 김일성 빨치산 부대장 중 한 명에게 우리 국방부가 ‘항일투사라는 훈장’을 달아준 셈이다. 현재의 남북관계에서는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지금 중국과 대만 관계에서는 그런 꿈같은 일이 현실로 벌어지고 있다.
쭤취안 장군은 제1차 국공합작 시기인 1924년 장제스가 교장으로 있던 황푸군관학교 제1기생으로 입학했으며, 1925년 2월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다. 그는 이후 1937년 제2차 국공합작에 참여해 일본에 대항해 싸우다 1942년 5월25일 전사했다. 일본이 타이항(태항)산에 있는 팔로군 근거지를 포위공격해오자 이에 맞서 퇴로를 뚫기 위해 싸우다 숨진 것이다. 당시 그의 나이는 37살이었다. 이 전투는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무정 장군이 이끌던 조선의용군이 팔로군과 함께 전투에 참여했으며 윤세주·진광화 열사가 전사했다. ‘조선의용군 최후의 분대장’으로 잘 알려진 고 김학철 선생도 이 전투에서 당한 부상으로 다리를 잘라야 했다.
대만 국방부는 쭤취안 장군을 순국영장으로 선정한 근거를 제2차 국공합작에서 찾는다. 국공합작 때 공산진영은 국민당의 지휘를 받기로 했고, 이에 따라 홍군도 국민혁명군 내의 제8로군으로 편제됐다가 이후 18집단군으로 승격됐다. 쭤취안 장군은 바로 이 팔로군과 제18집단군에서 부참모장을 지냈다. 그러므로 ‘공산군 장군 쭤취안’이 아니라 ‘국민혁명군 소속 팔로군 부참모장 쭤취안’에게 순국영장 칭호를 준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대만 국방부의 결단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일본이 패퇴한 1945년부터 1949년까지 공산당군과 국민당군은 치열한 내전을 치렀기 때문이다. 그 전투에서 양쪽은 수많은 희생자를 냈으며, 국민당군은 공산당군에 패해 대만으로 옮겨가는 처지가 됐다.
대만 국방부의 이번 조처는 그렇게 70년 가까이 양안의 군부를 옥죄어온 그 내전의 망령에서 이제 벗어나자는 화해의 메시지로 읽힌다. 대만의 언론들도 이런 대만 국방부의 과감한 화해 조처가 이미 활성화된 경제·사회부문 교류를 한 단계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본다.
눈을 한반도로 돌려보자. 중국-대만 사이에 조성되고 있는 군사부문의 훈풍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다. 살을 에일 듯한 찬 바람만 씽씽 불고 있다. 김대중·노무현 대통령 시절 몇 차례 진행되던 남북군사회담은 이제 거론조차 할 수 없는 분위기다. 오직 서로 상대방이 군사도발을 했다고 비판하는 목소리만 가득하다. 이제 곧 3월이 돼 한미군사훈련이 시작되면 남북 군부의 갈등은 최고 수준으로 높아질 것이다.
용사국혼달력의 발간에 맞춰 진행된 지난 1월6일 대만 국방부 기자회견에서 대만의 한 기자는 “그렇다면 쭤취안 장군이 충렬사에도 묻힐 수 있는 거냐”는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충렬사는 항일전쟁과 국공내전 등에서 국민당 정부를 위해 목숨 바친 군인들의 영령을 모시기 위해 1969년에 세워진 곳이다. 우리로 치면 국립현충원에 해당하는 곳이다.
‘충렬사에 안장되는 쭤취안 장군’은 중국과 대만 관계에서도 아직까지는 꿈같은 이야기일 수 있다. 하지만 방향만 제대로 잡으면 아무리 먼 목적지라도 언젠가는 도달할 수 있는 법이다. 중국-대만 간의 더 깊은 군사적 화해가 기대되는 이유다.
대만 국방부발 훈풍이 양안을 넘어 한반도에까지 불어오기를, 그리하여 얼어붙은 남북의 군사관계에도 화해의 싹이 틀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김보근 한겨레평화연구소장 tree21@hani.co.kr
김보근 한겨레평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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