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올해 신년사에서 최고위급 회담을 거론하면서 부풀어 올랐던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기대감이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국가정보원장을 지낸 이병기 청와대 비서실장이 국정원 라인을 동원해 뭔가 할 것이라는 일부의 예측이 있었지만, 이제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렵게 된 듯하다. 이 비서실장 자신이 ‘성완종 리스트’의 핵심인물이 됨으로써 현직 유지조차 불투명한 상황에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민들이 박근혜 정부에서 남북정상회담 성사 가능성을 낮게 보는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것 같다. 남북이 서로 상대방의 얘기엔 귀 기울이지 않고, 자기 주장만 하고 있는 탓이 크다. 현재 남북의 주장을 보면, 남은 ‘화성말’을 하는데 북은 ‘금성말’을 하는 것만 같다. 대화가 아니라 서로 상대방을 향해 고함만 치고 있는 모양새다.
먼저 통일부가 지난 21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에서 보고한 ‘제2차 남북관계발전 기본계획 2015년도 시행계획’을 보자. 통일부는 올해 주요 대북사업으로 남북 공동행사를 추진할 ‘광복 70주년 남북공동행사위원회’ 구성 대북 제안, 이를 통해 공동 씨름대회나 공동 축구대회 등 다양한 문화·예술·체육 분야의 행사 추진 등을 꼽았다.
반면, 김정은 제1비서는 올해 신년사에서 최고위급회담 등의 전제조건으로 ‘외세와 함께 벌이는 무모한 군사연습 등 모든 전쟁책동 중지’와 ‘제도통일 추구 중지’를 내세웠다. 북은 또 기회 있을 때마다 삐라 살포 중지 등을 남북대화의 조건으로 밝혀왔다.
대화가 되려면 서로가 대화의 필요성을 느껴야 한다. 그러려면 서로 상대방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안을 테이블에 올려놓아야 한다. 하지만 현재 남북이 주장하는 대화의 주제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크게 보면 북은 한반도를 둘러싼 거시적인 군사·정치 문제를 시급히 다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남은 남북공동의 문화행사 등 미시적인 교류를 중심으로 얘기하고자 한다. 그러니 서로에게는 각각 ‘화성말’과 ‘금성말’로 들릴 것이다.
이런 꽉 막힌 상황을 뚫으려면 화성말과 금성말을 풀어줄 통역자가 있어야 한다. 노무현 정부 시절 열린 6자 회담에서는 북한과 미국이 화성말과 금성말을 했다. 이때 통역자는 남한 정부였다. 남한 정부가 중간에서 서로의 속내를 전해주는 등 별나라말을 풀어주었기에 북한과 미국이 2005년 9·19 공동성명 등에 동의할 수 있었다. 이 성명은 북의 핵계획 포기와 안전보장 등 핵심적인 한반도 평화방안을 담고 있었다.
남북이 별나라말을 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는 남쪽 민간단체들이 통역자가 될 수 있다. 이들은 그동안 남한 정부의 잇단 ‘제한 및 불허’, 북한 정부의 ‘지원물품 수령 거부’ 탓에 활동이 위축돼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올해는 광복 70주년과 6·15 공동선언 15돌을 맞아 민간이 주도하는 남북 공동행사 개최에 공을 들이고 있다. 지난 4월1일 대규모로 ‘광복 70돌, 6·15 공동선언 발표 15돌 민족공동행사 준비위원회’도 꾸렸다. 북과 실무회담을 해온 시민단체들은 “북은 6·15 공동행사 승인 여부를 보고 남쪽 당국의 남북관계 개선 의지를 평가할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대북지원단체들은 또 남쪽 정부가 영유아 지원에 한정하지 않고 대북지원의 폭을 넓혀주면 북쪽 정부를 충분히 설득해서 대북지원활동이 다양하게 재개되도록 하겠다고 밝힌다.
민간단체들의 활동이 활발해지면, 이들을 통해 남북 정부의 진정성 등이 양쪽 정부에 전달될 것이다. 그때 비로소 남북은 별나라말만 하며 정상회담 개최의 마지막 가능성을 허투루 날려보내는 안타까운 모습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진짜 대화’가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다.
김보근 한겨레평화연구소장 tree21@hani.co.kr
김보근 한겨레평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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