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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명수의 사람 그물] ‘개와 늑대의 시간’

등록 2015-08-10 18:26

차량 정체가 극심한 퇴근시간. 뒤차가 내 차를 박은 느낌이 아주 살짝 왔다. 충격도 거의 없는데다 범퍼란 원래 충격을 흡수하는 장치라는 나름의 생각도 있고 뒤쪽 차창에 세월호 스티커를 큼직하게 붙이고 다니는 터라 아량있게 보일 요량으로 창문을 열고 가해차량 운전자와 눈으로 손으로 괜찮다는 인사를 주고받은 후 창문을 닫았다. 그랬더니 잠시 후 뒤차의 운전자가 차에서 내려 다가오더니 교통경찰의 포스로 내게 물었다. ‘선생님, 혹시 술 하셨나요?’ 호의가 의심으로 되돌아오는 현장에서 분노를 자제하기란 쉽지 않다. 손이 발이 되는 사과를 받고 끝냈지만 그가 왜 그랬는지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음주운전이었다면 그걸 빌미로 무슨 이득을 챙기려는 목적이었는지, 자기가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미심쩍은 행동을 하는 운전자의 정체를 밝히려는 정의감 때문이었는지 그건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사건의 후일담에서 양자의 입장은 서로 달랐을 것이다.

내가 아는 이들은 그 얘기를 듣고 상대 운전자를 어이없어했지만, 그 운전자가 자기 회사 동료들과 얘기할 땐 또 달랐을 것이다. ‘별 이상한 사람 다 봤다’거나 ‘미심쩍은 부분을 끝까지 파 봤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을 술안주 삼았을 것이다.

세월이 갈수록 명명백백이라는 게 한쪽만의 시각일지 모른다는 의심을 하게 된다. 근자에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확하지 않은 여러 폭로전을 접하면서 더 그렇다. 어느 쪽 시각에서 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얘기가 되는 경우가 숱하다. 무엇이든 화끈하게 구분하고 입장도 그래야 한다는 흑백 강박사회의 부작용일지 모른다. 도냐 모냐를 정확히 하지 않으면 윽박지른다. 엄마와 아빠 중에 누가 더 좋으냐 묻는 이에게 다 좋다 답하면 그런 게 어디 있느냐고 짜증을 낸다. 조금이라도 더 좋은 사람이 있을 테니 양자택일하라는 거다. 어떤 사안에서 행간을 읽느라 주저하는 이들은 결정장애가 있는 사람으로까지 몰린다.

어떤 문제를 제기하면 즉각 방법론을 묻는다. 처세술 강사에게나 어울릴 법한 화끈한 액션플랜을 요구한다. 문제의 본질에 잠시도 머물지 않는다. 문제를 정확히 인식하면 해법이 그 안에 있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그걸 믿지도 않을뿐더러 시간도 없다 재촉한다. 매사 그런 식이다. 소통이 되지 않으면 근본적 원인을 고민해야 하는데 실용적 소통 전략과 설득을 위한 방법론부터 강구한다. 사적, 공적 영역 모두에서 그렇다. 한 인간의 개별성에 집중할 리 없다.

사거리 신호등처럼 사람도 그렇게 명확히 구분되길 원한다. 혈액형에 따른 심리유형으로 세상 사람을 나누면 에너지 소모가 줄긴 한다. 그 틀에 넣으면 되니까 누군가에 대해서 애매모호할 필요가 없다. 그러다가 자기가 해석한 프레임에 들어오지 않으면 ‘저 사람이 저럴 줄 몰랐다’ 의심하거나 실망하거나 비난하면 된다. 간단하고 확실하다. 문제는 내가 남에게 적용했던 그런 잣대가 내게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대로 변명조차 못한 채 당황하고 분노하고 억울했던 경험, 살면서 얼마나 많았던가.

이명수 ‘치유공간 이웃’ 대표
이명수 ‘치유공간 이웃’ 대표
새벽이나 해 질 녘. 저 멀리 언덕 너머로 다가오는 실루엣이 내가 기르던 개인지 나를 해치러 오는 늑대인지 분간할 수 없는 시간을 일컬어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고 한다. 적과 동지를,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기 힘든 모호한 순간이다. 그런 시간을 잘 통과하는 방법은 개인지 늑대인지 분명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애매모호함을 견디는 것이다. 늑대라 단정해 섣부르게 총질을 하거나 개라 착각해 불쑥 다가가지 않는 것이다. 날이 밝으면 저절로 모든 게 명확해진다. 특별히 사람관계에서, 개와 늑대의 시간을 통과하며 힘겨운 이들에게 전한다.

이명수 ‘치유공간 이웃’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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