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이명수의 사람 그물] ‘믿는 것도 능력이다’

등록 2015-09-07 18:41

한달 전 칼럼의 들머리에 접촉사고에 관해 썼다. 뒤차가 내 차를 살짝 박아서 대수롭지 않은 듯해 그냥 가라 했더니 뒤차 운전자가 의혹에 가득 찬 눈길로 내게 음주운전 여부를 물었고 결국 그가 손이 발이 되도록 사과했다는 내용이었다. 그 칼럼이 나간 직후 비슷한 사고가 또 있었는데 결과는 전혀 달랐다.

뒤쪽으로 충격이 와서 외길이라 일단 차를 옆으로 빼자 했고 서로 다친 데는 없는지 물었다. 나이 지긋한 뒤차 운전자가 깊이 사과했고 나는 다친 사람 없이 이만하길 천만다행이란 덕담을 건넸으며 그의 연락처를 받은 후 헤어졌다. 뒷목을 잡지도 않았고 현장 사진도 찍지 않았다. 헤어지기까지 채 5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 후 가해 운전자의 조처는 신속하고 신뢰로웠다. 그가 가입한 보험사에서 연락이 왔고 그와 관련이 있는 이가 몸이 괜찮은지 물어왔다. 저녁에 정비소에 차를 맡기고 돌아가는데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험하게 처리하지 않아서 고맙다고. 외려 내가 고맙다고 했다. 상식적인 조처를 곧이곧대로 받아줘서. 진심으로 그랬다.

자초지종을 들은 지인이 내게 물었다. 선의를 베풀었다가 오해받은 적 있는데 어떻게 곧바로 또 그랬느냐고. 많은 이들이 그런 것처럼 운전 스트레스 중 적지 않은 게 접촉사고 시 상대방의 대응이다. 별것도 아닌 일에 아들뻘 되는 운전자가 다짜고짜 욕설부터 앞세우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상대방을 먼저 배려하면 내가 지는 거고 손해라는 생각이 모두에게 가득하다. 함부로 선의를 베풀다간 덤터기를 쓸 수도 있다는 피해의식도 강하다.

가해 차량 운전자였을 때 모멸감을 느낄 정도로 호되게 당했던 어떤 이는 자신이 피해 차량이 되었을 때 상대에게 너그러워지겠다 굳게 결심했고 몇 년 후 그 꿈을 이뤘다고 했다. 고마워하는 가해 차량 운전자에게 다른 이에게 비슷한 선의를 베푸는 걸로 갚아달라고 부탁했단다. 내 선의가 배반당하지 않을 거라는 소박한 믿음을 견결하게 지키는 일은 쉽지 않다. 하지만 영화 <베테랑>의 한 대사에 기대자면 그런 게 진정한 ‘가오’다.

며칠 전 실전무술에 가까운 운동을 하는 막내아들이 대회에 나갔다. 얼굴은 때리면 안 되는데 주먹으로 상대방의 얼굴을 가격하게 됐다. 순간 아이는 시합 중이라는 것도 잊은 듯 무방비 상태로 상대의 얼굴을 감싸 안을 것처럼 ‘아이구 어떡해요…죄송합니다’ 했다. 경기가 끝난 후에도 쫓아가 또 사과했고 상대도 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막내아이의 선한 품성이 날것 그대로 드러난 풍경이어서도 그랬지만 선의가 있는 그대로 오가는 풍경은 아름다웠다. 거기에 대고 격렬한 타격음이 오가는 현장에서 그런 식의 선의 표출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충고는 꼰대의 교훈질에 불과하다.

‘다른 사람을 믿을 수 있는 것도 능력’이라는 누군가의 말이 세월이 갈수록 생생해진다. 나의 선의를 음모나 허술함으로 받아들이는 상대 때문에 갑갑한 경우도 많지만 그렇다고 ‘이제부턴 아무도 안 믿을 거야’ 식의 철옹성 같은 대처는 더 혹독한 대가를 요구한다. 끝까지 그렇게 철옹성처럼 홀로 살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내가 그렇듯 누구에게나 선의는 있다. 선의는 선의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선의를 가장한 해코지일까봐 걱정할 필요도 없다. 사람에겐 자기를 보호하려는 무의식적 건강성이 있다. 스스로의 안목을 믿으면 된다.

이명수 ‘치유공간 이웃’ 대표
이명수 ‘치유공간 이웃’ 대표
놀랍게도 접촉사고 사흘 후 그 나이 지긋한 운전자가 직장에 다니고 있는 우리 큰아들과 어떤 거래를 하게 됐고 그러다가 나와의 관계를 알게 됐고 그의 도움으로 아들내미는 특별한 성과를 거뒀다고 했다. 그 얘기를 전하는 아이의 얼굴을 보다가 문득 내 현재도 누군가의 선의에 기댄 음덕의 결과물이겠구나 생각했다.

이명수 ‘치유공간 이웃’ 대표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위기의 삼성에서 바뀌지 않은 것 [한겨레 프리즘] 1.

위기의 삼성에서 바뀌지 않은 것 [한겨레 프리즘]

[사설] 계속 쏟아지는 윤-김 의혹, 끝이 어디인가 2.

[사설] 계속 쏟아지는 윤-김 의혹, 끝이 어디인가

트럼프 2.0, 윤 대통령 ‘가치 외교’가 설 자리는 없다 [박현 칼럼] 3.

트럼프 2.0, 윤 대통령 ‘가치 외교’가 설 자리는 없다 [박현 칼럼]

검찰, 이대로면 ‘명태균 지시’ 따른 셈…예상되는 수사 시나리오 4.

검찰, 이대로면 ‘명태균 지시’ 따른 셈…예상되는 수사 시나리오

섬으로 들로…꿀벌 살리기 위해 오늘도 달린다 5.

섬으로 들로…꿀벌 살리기 위해 오늘도 달린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