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종 교육원장 현응 스님이 최근 ‘깨달음이 도대체 어떤 것이기에 평생을 노력해도 성취할 수 없느냐’고 한 물음이 화제다. ‘깨닫기 위해 조계종에선 중추적인 승려 2천여명이 연중 절반을 두문불출하고 참선하는데도 아무도 깨달았다는 사람이 없는데, 어찌된 것이냐’는 것이다. 설악산 신흥사 조실 오현 스님도 지난달 “가톨릭 프란치스코 교황은 ‘세월호’ 같은 중생들의 오늘날 고통을 화두로 들고 있는데 한국 불교의 선승들은 ‘무’(無), ‘뜰 앞의 잣나무’ 등 천년 전의 ‘죽은 화두’만 붙잡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이런 죽비에도 수행의 핵심인 ‘선정과 깨달음’의 중요성을 간과한다고 반발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의 말대로 몰입의 절정인 선정에 이르기 위해 구체적인 방편을 가지고 있다는 게 불교의 큰 장점이다. 그러나 금가루가 아무리 귀중해도 눈에 넣으면 독이 된다. 산삼이 아무리 귀한 약이어도 열병 환자에겐 비상이 될 수 있다. 선정과 깨달음 지상주의에 빠진 한국 불교에 다시 같은 약만 계속 들이미는 게 그 격이다.
과연 선정과 깨달음은 무엇을 위함인가. 세속에서 열심히 공부해서 고시에 합격해 일신이 출세하는 것과 다름없는 것인가. 중생 위에 군림하기 위함인가.
붓다가 천상락을 거부하고 고해바다에 나온 뜻은 ‘요익중생’(饒益衆生)이다. ‘모든 생명을 이롭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이런 가치관 정립이 시작이자 끝이다. 이 가치관의 실천자가 보살이고 붓다다. 그런데도 선정력이 일신의 명예와 소유욕이나 채우는 데 쓰인다면 의사의 칼이 아니라 강도의 칼일 수 있다. 그것은 일본의 선승들 대부분이 침략전쟁에 힘을 보태준 데서 보여준 바다. 선(禪)의 사촌 격인 양명학자들이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고향 조슈번에서 이토 히로부미 등에게 수억 아시아인들을 지옥에 몰아넣은 야욕을 길러준 데서도 볼 수 있다.
따라서 쓰나미 같은 욕망의 물결에 휩쓸릴 때, 편견대로만 보고 싶을 때, 부자와 권력자만 사랑스럽고 약자는 싫어질 때가 바로 부동의 선정력을 발휘할 때다. 작은 유혹엔 토끼처럼 반응하면서 고통 중생들이 홍수에 떠내려갈 때 이를 외면하고 선정에 들어 있다면 그것은 깨달은 것이 아니라 인간이 덜된 것이다.
지금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고통 중생들과 함께하며 보살행을 하는 스님들이 많다. 그러나 적지 않은 선승들은 베풀지 않고도 대우받는 무위도식을 당연시한다. 깨달음 지상주의가 낳은 폐풍이다. 3개월간 안거를 끝낸 선승들이 해제비를 받아 해외여행을 떠났다는 얘기는 많지만, 중생의 은혜를 갚기 위해 봉사하러 갔다는 소식은 거의 듣지 못했다.
선승들의 규범서인 <선원청규>의 ‘좌선의’엔 선정과 깨달음의 목적이 분명히 적시돼 있다. 이 교범은 ‘무릇 보살은 우선 대비심을 일으켜 큰 서원을 세우고, 선정을 닦아 맹세코 중생을 제도하려 할지언정 자기 한 몸만을 위해선 해탈을 구하지 말라’로 시작한다.
최근 충남 예산 수덕사에서 뜻깊은 학술대회가 열렸다. 만공 스님(1871~1946)이 실은 일제 때 독립을 위해 천일기도를 했고, 만해 한용운에게 몰래 독립자금을 건네곤 했다는 것이다. 만공이 누군가. 경허의 수제자다. 경허는 고사 직전의 선을 부활시킨 선의 중흥조라는 칭송과 함께 술·고기·여자를 가리지 않고 취한 파격적 행보로 승가의 타락을 부추기고, 도탄에 빠진 중생을 외면했다는 비판도 받는 인물이다. 그런데 만공의 행보는 스승 경허마저 다시 보게 한다.
만공의 사형인 수월은 일제 때 나라 잃고 고향을 잃은 백성들이 쫓겨 간 간도에서 따뜻한 주먹밥을 해 먹였다. 불교에 관심이 많은 김진태 검찰총장이 10여년 전 <물속을 걸어가는 달>이란 수월 전기에서 쓴 얘기다. 또 혜월은 절에서 쌀가마니를 훔치는 도둑의 지게를 부축해주며 “넘어지지 않게 조심조심 내려가고, 먹을 것이 떨어지면 또 오라”고 했다고 한다.
경허가 지어준 수월, 혜월, 만공의 법호에 모두 달이 들어 있다. 이번 한가위는 이 세 달처럼 부족과 허전함을 채워줄 일이다. 그 자비의 마음이 바로 너와 나와 세상을 밝힐 진짜 보름달이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cho@hani.co.kr
조현 종교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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