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의 지난 16일 국정연설은 ‘지도자 박근혜의 철학 부재’를 그대로 드러냈다. 특히 대북 인도지원을 중단한다는 내용은 그 절정이었다. 인도지원은 어떤 상황에서도 제재수단이 돼선 안 된다. 그런데 박 대통령은 대북제재에 올인하면서 사용해서는 안 되는 인도지원까지 ‘무기’로 사용했다. 대통령 자신이 인도주의에 대한 확고한 철학이 있다면 저런 얘기는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국정연설에서 박 대통령은 “과거처럼 북한의 도발에 굴복하여 퍼주기식 지원을 하는 일도 더 이상 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밝혔다. 이어 그 다음날인 17일 통일부 정준희 대변인은 “현재 북한의 도발이 계속 악순환되는 엄중한 상황에서는 인도적 교류도 잠정중단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여기에는 모자와 영유아 등 북한 취약계층에 대한 지원도 포함된다. 북한이 식량난을 국제사회에 호소한 1995년 이후 한국 정부가 북한의 취약계층 지원을 잠정적으로나마 ‘전면중단’시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김영삼 정부도 사실 대북 인도지원을 달가워하지는 않았다. 정부 기관이 공문을 보내 대북지원단체들의 대중적 모금 캠페인을 중단시키거나, 심지어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요원이 지원단체 회원에게 전화를 걸어 탈퇴를 종용하기도 했다. 김영삼 정부는 이렇게 대북지원활동이 폭발적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대한적십자사 등을 통한 지원의 문은 열어놓았다. 굶주리는 동포에 대한 지원을 막는 것을 국민들이 하나의 범죄처럼 인식했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도 5·24조처로 남북관계를 거의 끊어놓았지만, “취약계층에 대한 인도적 지원만은 계속한다”고 밝혔다.
역대 정부가 어떤 상황에서도 대북 인도지원을 완전히 끊지 않았던 것은 인도지원이야말로 동포를 돕는 행위를 통해 ‘우리가 인간임을 확인하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북한 응징이라는 목적에 치우쳐 도움이 절박한 사람들을 내팽개치는 것은 우리 마음속에 인간성이 아니라 악마성을 키우는 것이다.
더욱이 국정연설에서 밝혔듯이, 박 대통령 스스로 2014년 3월 드레스덴 선언을 통해 북한 모자보건사업 등 인도지원사업을 강조한 바 있다. 그때 인도지원사업은 도대체 무슨 마음으로 제시한 것이었을까? 대통령의 속마음을 알 길은 없다. 그러나 이번 국정연설로 인해 드레스덴 선언도 이제는 “내 말을 들으면 주고 듣지 않으면 안 주겠다”는 ‘당근과 채찍 전술’ 정도로밖에 볼 수 없게 됐다.
역효과의 가능성도 크다. 대표적 인도지원 엔지오인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의 홍상영 국장은 “이번 국정연설은 북한 정부와 민간을 분리한 뒤 북한 주민들의 마음을 얻는다는 정부의 대북 기본 정책도 포기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인도지원까지 막는 것은 봉쇄를 통해 북한을 굴복시키겠다는 것인데, 이는 “북한 정부와 주민을 다시 대남 적개심으로 똘똘 뭉치게 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불과 20년 전 남북은 동포애라는 말조차 꺼내기 힘든 적대적 관계였다. ‘무찌르자 공산당’과 ‘쳐부수자 괴뢰도당’이라는 살벌한 말들만이 서로를 호명하는 구호였다. 그런 구호들로 가득 차면서 한반도에서는 민주주의마저 얼어붙고 사회적 공기마저 차갑게 변했었다.
대북 인도지원이야말로 이런 적대적 남북관계를 화해 분위기로 만든 일등 공신이다. 그런데 박 대통령이 그 정신을 훼손하고 있다. 개성공단 전면중단 조처도 그렇지만, 박 대통령은 그동안 우리가 소중히 키워온 자산들을 너무나 쉽게 망가뜨리고 있다.
김보근 한겨레평화연구소장 .tree21@hani.co.kr
김보근 한겨레평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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