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되는 녹조로 몸살을 앓고 있는 낙동강의 수계 5개 보가 일제히 수문을 개방했다. 16일 오전 낙동강 창녕 함안보의 수문 3개를 동시에 열자 물감을 뿌린 듯한 진한 초록색의 물이 쏟아져 내리고 있다. 창녕/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지난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반 무렵, 신문사에는 디지털카메라가 보급되기 시작했다. 당시엔 현장에서 필름으로 찍어 프린트 작업을 한 뒤 사진의 형태로 마감하던 시기였다. 그러다 보니 출장을 가려면 필름은 물론, 현상, 인화 그리고 전송에 필요한 각종 약품에 장비까지 다 들고 가야 했다. 그 부피와 무게도 버거웠지만 취재한 필름을 현상해서 서울 본사로 마감시간에 맞춰 전송하는 시간도 만만치 않았다. 오죽하면 ‘지방 출장은 취재가 절반, 마감이 절반’이라는 말이 생겼겠는가? 그러던 차에 디지털카메라가 생겼다. 이건 필름도 약품도 필요 없다. 출장지의 현상소가 문을 닫으면 좁아터진 여관방 화장실에서 마음 졸여가며 필름 말고 약품 탈 일도 없다. 찍어서 바로 노트북에 꽂으면 만사 오케이다. 출장 갈 때면 주저리주저리 가져가던 짐의 양이 절반 이상 줄어들었다.
모두가 고마워하던 이때, 문명의 이기에 반기를 든 사람이 우리 부서에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이번 주 웁스구라에 등장하는 사진을 찍은 ㄱ기자다. 평소 사진에 대해 남다른 사명감을 가지고 있던 ㄱ기자는 디지털카메라가 막 등장했을 당시 “난 필름카메라 대신 사진기자의 손에 디지털카메라가 쥐여지는 순간,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공표를 했다. 이유인즉, ‘디지털은 영혼이 없다’는 것인데 초창기 디지털카메라가 기술적으로 많이 부족해 색감이나 해상도 등에서 필름에 비해 질적으로 현격한 차이가 있었음도 한몫했다. ㄱ기자는 세월이 흘러 드론이 등장했을 땐 “난 절대로 드론을 안 잡을 거다”라고 다시 공언했다. 인간을 버튼 누르는 기계로 전락시킨다나? 그래서 그분은 지금 어떻게 됐느냐고? 여전히 잘 다닌다. 가슴 한구석엔 언제고 내놓을 사표를 간직한 채 말이다.
그렇게 문명의 세계(?)로 편입되는 것을 거부했던 이 ㄱ기자가 지난 16일 드론을 가지고 낙동강의 남쪽인 창녕·함안보를 찾았다. 한쪽 어깨에는 디지털카메라를 메고. 짙푸른 녹색의 향연? 하늘을 닮아야 할 강물의 색깔이 녹음으로 우거진 산과 들을 빼다 박았다. 가람이 생긴 이래 유유히 흐르던 물줄기는 인간이 막아놓은 구조물에 갇혀 더 이상 흐르지 않았다. 더는 못 보겠는지 낙동강 수계의 5개 보를 일제히 열어 방류하던 날이었다. 보의 문이 열리고 갇혔던 물이 쏟아지는 순간 물감을 푼 듯한 녹조가 쏟아져 내렸다. ㄱ기자는 방류되는 물을 보 위에서 사진에 담다 욕심이 생겼다. ‘열린 수문 앞에서 마구 내려오는 물결을 잡아야지.’ 디지털카메라가 손에 쥐여지는 순간 사표 쓴다던 ㄱ기자는 그 자리에서 드론을 띄웠다. 수문 밖으로 튀어나오는 세찬 물줄기에 섞인 바람 때문에 자칫 드론이 균형을 잃고 익사(?)하기 십상이었다. 강물에 빠지면 지금까지 찍은 데이터가 수장되니까 한 컷 찍고 드론을 보 위로 올려 노트북에 내려받고 하기를 십여 차례, 뱃속 가득 부대끼던 녹조를 강물이 토해내는 듯한 보기 힘든 장면이 고스란히 담겼다. 사진이 나가고 독자들의 전화가 왔다. 색깔이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ㄱ기자는 자신이 본 것과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이 사진을 본 타사 기자들은 ㄱ기자에게 “올해 녹조 사진은 더 못 찍겠다”고 했단다. 이만한 사진 찍기가 쉽지 않다는 말이다.
많이 알고 익히는 것은 중요하다. 그런데 내게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더 중요한 것 같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 살면서 그 많은 것을 어찌 다 익히나? 열린 수문 앞에서 쏟아지는 녹색물을 잠자리처럼 찍어 모두를 뜨악하게 했으면 적어도 내게 필요한 기술이 뭔지를 안 것 아닌가? 그나저나 저 물은 누가 다 마실까?
윤운식사진에디터 yw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