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1000일 제11차 촛불집회가 열린 1월7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리멤버0416 회원들이 세월호 참사 진실규명을 요구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1073일 동안 어두운 물 아래 잠겨 있다 올라오는 세월호를 보면서 많은 이들이 참담함과 안도감 속에서 할 말을 잃은 채 눈물을 글썽였다. 적막한 침묵으로 가득한 내 마음에 페이스북 친구들의 짧은 두어마디 말들이 위로를 주었다. 이영광 시인은 이렇게 썼다. “갖가지 핑계와 늑장과 발뺌과 방해 끝에 이제 배가 올라오려고 한다. 저 배가 올라오면, 누군가는 펄과 해조와 잡동사니의 어둠 속으로 들어가야겠지. 그들에게 가호를.” 또 다른 지인은 “그날 이후, 사람을 생각할 때 내 모든 기준은 세월호가 되었다. 정치가이든, 친구이든, 가족이든, 세월호는 지금까지의 내 삶에서 가장 명확한 기준이 되었다”고 말한다. 이 글을 읽으며 지난 3년간 나 역시 비슷한 심정이었음을 깨달았다.
몇년 전, 내가 무척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치적 사안에 대해 ‘조금 더 차가워지고 싶다’고 말했던 동료의 미지근함에 서운함을 느낀 적이 있다. 그런데 세월호 참사에 대해 그는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고 열심히 움직였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 그의 온도를 문제 삼은 내가 모종의 정치적 편협함에 갇혀 있었던 것은 아닌가 반성했다.
우리가 느끼는 바람직한 정치의 온도는 각자 다르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정치가, 다른 정당을 지지하며 다양한 스펙트럼의 정치적 견해들을 표현한다. 하지만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세월호에 대해서는 한마음으로 통증을 느낀다. 아마도 ‘세월호’라는 사건의 온도는 36.5도이고 그것은 사람의 온도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 온도는 사람의 정치가 시작되는 온도이고, 그 이하로 떨어질 때의 상황은 야만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되고 만다.
배가 물 위로 천천히 떠오르면서 지난 시간의 여러 사건들도 다 같이 떠오른다. 먼저 모든 사람이 극심한 통증을 느꼈던 3년 전의 그날이 떠오른다. 배가 가라앉고 있고 그 안에 사람들이 있는데도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모두가 절망과 무력감을 느꼈다. 청와대 관저에 있던 대통령도 우리와 똑같이 놀라고, 전원이 구출되었다는 언론의 오보에 잠시 안도하기도 했다고 한다. 우리가 그의 무능함을 비난하자 그를 옹호하는 이들은 대통령이 전능한 존재는 아니라고 항변한다. 그 7시간 동안 대통령이 무엇을 했든 결과는 바뀌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이다.
우리는 모든 종류의 무능함을 비난하지는 않는다. 그의 아버지는 무엇이든 ‘하면 된다’고 하면서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외쳤다. 하지만 우리는 다르게 생각한다. 세상에는 인간 능력 밖의 일이 있으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조건이 보장되지 않은 상태에서 능력을 입증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지독한 폭력이다. 그러므로 무능했던 대통령을 비난할 때 우리가 사실상 비난하는 것은 무능력이라는 말 뒤에 은폐되어 있는 그 무엇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는 <무지한 스승>에서 18세기의 교육자 조제프 자코토의 특별한 교육법을 언급하면서, 인간의 역량은 “우리가 본 것과 말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하나의 힘”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랑시에르는 이런 예를 든다. “자코토의 인쇄공에게는 정신이 박약한 아들이 한 명 있었다. 사람들은 그 아이를 데리고선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체념했다. 자코토는 아이에게 히브리어를 가르쳤다. 그 뒤에 아이는 훌륭한 석판공이 되었다. 물론 히브리어는 그에게 아무 짝에도 쓸모없었다. 재능을 더 타고났고, 더 지도받은 지능들이 영원히 알지 못할 것―그것은 히브리어에 속하는 것이 아니었다―을 알게 된 것 말고는.” 아이는 히브리어를 사용할 일은 없었지만, 자코토에게서 히브리어를 배우면서 무언가에 깊이 주의를 기울이는 법을 배운 것이다.
만일 우리의 능력을 ‘주의를 기울이는 힘’이라고 정의한다면, 무능력은 ‘주의력의 결핍’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그날의 대통령에게서 문제 삼는 것은 정확히 이런 종류의 무능함이다. 전 국민이 세월호에 갇힌 사람들의 생명에 온 신경과 주의를 집중하고 있을 때, 그는 “다 그렇게 구명조끼를, 학생들은 입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발견하기가 힘듭니까?”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그날 이후 매일매일 고통의 날짜를 세고 있는 가족들과 국민 앞에서 참사가 어느 해에 일어난 일인지를 혼동하며 말했다.
우리가 지금 문제 삼는 무능함은 한마디로 놀라운 주의력의 결핍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이런 무능함은 최고의 컴퓨터공학자가 요리나 피아노 연주에는 무능하다고 말할 때의 능력 결핍과는 다르다. 주의력 결핍에서 오는 무능은 특정 분야나 특정 사안에서의 전문적 수행 능력의 부족이나 부재와는 질적인 차이가 있다. 그가 정치가든 피아니스트든 석판공이든,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주의를 집중하지 않으면 그 일을 잘 수행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든 영역을 망라해서 발휘될 수 있는 기본적인 무능력이다.
탄핵심판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세월호 7시간을 가장 문제 삼았던 것은 그것이 다른 어떤 사건들보다 정서적 파장이 컸던 참혹한 사건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시간은 대통령이 국정을 운영하는 주의력의 수준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주의력 부재에서 비롯되는 본질적 무능을 드러내는 본보기이다. 우리가 그에게 그 시간 동안 무엇을 했는지 계속 되묻는 것은 여성 대통령의 사생활에 대한 호기심과는 무관하다. 누군가는 그가 그 시간 동안 무엇을 했는지는 비본질적인 문제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본질적인 문제이다. 그 급박한 시간에 대통령으로서 무엇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는지는 우리가 낱낱이 확인할 수는 없는 모든 국정 운영의 시간에 그가 어디에 주의를 기울였는지 또는 기울이지 않았는지를 판단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크라튈로스>에서 이렇게 말한다. “짐승들 중에서 사람만을 안트로포스(anthr?pos)라 부르는 것은 옳은 일이지. 사람만이 본 것을 검토하니까(anathr?n ha op?pe).” 인간을 가리키는 그리스어 ‘안트로포스’는 자기가 본 것을 자세히 관찰하고 헤아리는 자라는 의미이다. 우리는 우리 손으로 뽑은 대통령에게 신적인 능력을 요구한 것이 아니다. 그저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주의를 기울이고 자기가 보고 들어야 하는 것을 보고 듣고 충실히 검토하는 지극히도 인간적인 능력을 요구했을 뿐이다.
그날 이후 자신의 무능력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다. 먼바다를 바라보며 가슴이 찢기는 고통을 느끼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희생자 가족과 선량한 시민들이다. 누구도 이들의 무능력을 비난하지 않는다. 오직 이들 자신만이 그 무능 때문에 괴로워하고 자책했다. 그리고 무능함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이들은 본 것과 말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며 참사의 진실을 검토하고 밝히려 했다. 특별법을 요구하고 특조위를 구성하며 희생자들을 위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정부는 법에 보장된 활동을 이어가려는 특조위에 일방적으로 조사활동의 종료를 통보하고 예산을 축소하고 인력을 감원시켰다. 해수부는 특조위의 3차 청문회 준비를 불법으로 규정하려고 했다. 교육부는 특조위가 청문회 장소로 계약한 사학연금관리공단에 압력을 넣어 계약을 파기시켰다.(창비주간논평 2016.8.31 ‘여소야대 국회여, 네 형제는 어디 있는가: 세월호특조위 활동 강제중단 사태와 20대 국회의 책임’, http://weekly.changbi.com/?p=7222&cat=5) 이 정부는 각 부처를 동원하여 희생자 가족들과 진상규명을 원하는 모든 이들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의 상태에 감금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세월호가 떠오른 이 순간에도 사람들은 상황이 달라지는 것이 없을까 염려한다.
4·16가족협의회는 해수부의 이번 인양계획을 18일에야 겨우 알게 되었다고 한다. 해수부는 인양작업과 관련해 피해자 가족들과 아무것도 협의하지 않았고 제대로 된 설명도 하지 않았다. 피해자 가족들은 애도의 주체이자 진상규명의 주체가 되어야 할 사람들이다. 이들은 2015년 현장 가까이서 배의 인양작업을 제대로 보기 위해 직접 작은 배 ‘진실호’를 구입하고 배를 몰기 위해 운전을 배우는 등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시도해왔다.(<한겨레> 2017.3.24 르포기사 ‘진실호를 타다’,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787910.html) 그것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떠나보내야 했던 희생자들에 대해 가족으로서 할 일을 다하는 길이라고 믿는다.
지난 3년 동안 이 정부는 유가족들이 진실을 알아낼 수 없도록 하는 데 모든 주의를 다 기울였다. 우리가 무능력이라고 믿었던 대통령의 주의력 결핍은 정확히 말해 결핍이 아니다. 그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기울여야 할 주의를 세월호 가족들과 국민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드는 데 쏟았다. 지인의 사익을 챙기고 그 딸의 승마 지원, 그리고 단골 성형외과까지 세심하게 챙기는 정성과 주의력을 지닌 사람을 주의력이 결핍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는 결코 무능한 대통령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주의력과 주변 인력을 총동원해서 국민을 무능력 상태에 묶어둔 정말 영리한 정치인이다. 그러니 그가 검찰에서 무려 7시간 동안 신문조서를 검토하는 집중력과 치밀한 주의력을 발휘했다는 것은 전혀 놀라울 게 없는 일이다.
우리가 무능한 대통령을 가진 것은 처음 있는 일은 아니고 그때마다 그들이 탄핵된 것도 아니다. 탄핵의 이유는 무능함이 아니라 절대로 마음 쓰지 말아야 할 것들에만 정성을 다하고 주의력을 기울였다는 사실에 있다. 그것이 지난 3년 동안 세월호 유가족들이 지켜온 광장에 다시 사람들이 모여 그의 구속을 외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의 주의력을 명백히 잘못 사용했기 때문에, 즉 그 자신의 부적절한 유능함 때문에 구속되어야 한다.
랑시에르는 민주주의란 무능력의 공간에 머물러 있기를 강요받은 이들이 그 상태에서 벗어나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부엌과 목화밭에 머물러 있을 것을 강요받았던 여성과 흑인이 투표소에 감으로써 그들의 능력을 입증했던 것이 민주주의인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깊은 주의력을 가지고 보고 생각하고 말하고 움직이는 순간, 우리는 무능의 상태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끊임없이 방해받아온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이 우리 사회 민주주의의 시험대인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진은영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