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행복팀 선임기자 ‘부시맨’은 같은 제목으로 국내에도 개봉한 1980년대 영화 덕분에,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아프리카 원시부족을 상징하는 이름이 됐다. 부락 위를 날던 비행기에서 우연히 떨어진 콜라병을 두고서 부락 안에서 분란이 일고, 결국 하늘에서 떨어진 콜라병을 신에게 돌려주려고 추장은 땅끝을 향해 여행을 떠난다. 여정 중에 마주치는 문명사회에서 겪는 코미디 같은 에피소드가 줄거리다. 순진무구해서 도리어 우스꽝스러운 부시맨은 문명의 맥락에서 동떨어진 아프리카 부족을 부르는 자연스러운 이름으로, 그렇게 불리었다. 부시맨이라는 말이 당사자인 아프리카 ‘산족’(San people)에겐 모욕적인 표현이라는 것을 최근에야 해외 매체에 실린 뉴스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그것도 연구윤리를 다루는 뉴스에서. 서양사람이 붙여준 부시맨 또는 코이산족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아프리카 산족들 중에서 남아공 산족평의회(SASC)가 앞으로 산족을 연구하기 위해선 연구윤리를 지켜야 한다며 연구자사회를 향해 자신들이 만든 연구윤리규약을 발표했다. <네이처>와 <사이언스>를 비롯해 여러 매체가 관심을 보이며 그 내용과 반응을 보도했다. 산족평의회는 원주민 연구의 윤리 원칙으로 존중, 정직, 정의와 공정, 배려를 요구했다(bit.ly/2nEscvQ). 산족의 문화와 역사를 존중하고 산족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해줄 것, 연구 목적이나 연구비 정보 등을 산족에게 투명하고 정직하게 밝힐 것, 연구에 참여해 얻을 혜택을 분명하게 논의하고 보장할 것, 산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복잡한 과학 언어로 혼란을 주거나 무지한 이로 취급하지 말 것 등을 요구했다. 산족이 연구윤리에 이처럼 심각해진 이유는 뭘까?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원시 종족”으로 불리는 산족은 그동안 각지에서 찾아온 연구자들로 시달려왔다고 한다. 이른바 문명사회에선 보기 힘든 전통 의례와 풍습들, 그리고 환경과 어울려 살 줄 아는 산족만의 건강 비법과 약초 지식들, 오래된 유전자를 간직해 인류 집단의 분기와 진화를 연구하는 데 도움을 주는 유전체(게놈), 이런 것들이 산족 바깥 세계로 연구자들이 가져간 산족의 지식, 경험, 문화, 생체정보였다. 한 사건이 기폭제가 됐다. ‘트러스트 프로젝트’라는 단체의 보고서(bit.ly/2nkVP2g)를 보면, 산족과 반투족의 게놈을 비교분석해 2010년 <네이처>에 발표한 논문이 문제가 됐다. 논문 부록에서 무지한 부시맨 또는 비문명인처럼 묘사된 데 대해 산족은 모멸감을 느꼈다. “부족 열등감으로 많은 부시맨 여성은 반투족 남성과 결혼해 신분 상승을 꾀하려 한다”는 말은 산족의 화를 돋우었다. 프라이버시 원칙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산족 지도자들은 <네이처>에 항의편지를 보냈고, 그동안 산족 지도자와 게놈 연구자, 윤리학자, 법률가 등이 모여 윤리규약을 마련해왔다. 산족 연구윤리 선언의 의미를 조금 넓혀 바라본다면, 특정 집단을 우리와 다른 존재, 분리된 존재로서 흥미의 대상이나 연구 자원으로만 바라보는 이른바 ‘타자화’의 위험을 지적하고 경계하는 것으로도 읽힌다. 머나먼 아프리카가 아니라 우리 주변에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한 채 타인에 의해 분석되고 설명될 뿐인 이들은 또 없을까? 사회적 지위가 낮거나 차별을 받는, 자신을 방어할 마땅한 수단이 없는, 그래서 주류와 정상의 시선에서 손쉽게 재단되고 타자로 분리되어 이야기되는 소수자 집단이 우리 주변에도 있을 것이다. 산족이 알려준 존중, 정직, 정의, 배려의 원칙은 단지 연구자들의 윤리규약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의미 있는 그런 것이 아닐 것이다. cheol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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