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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기고] 지연된 정의, 판사의 궐기 / 정재영

등록 2017-08-10 18:17수정 2017-08-10 20:32

정재영
병역거부 당사자·가족

8월8일 부산지법 동부지원 형사 단독 최경서 부장판사는 병역거부자 4명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한번에 무죄 선고를 4명이 받기는 처음. 이처럼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법원의 무죄 선고 기록이 연이어 경신되고 있다. 무죄 선고가 단독심에서 항소심으로, 평판사에서 부장판사까지, 서울에서 최남단 제주지법으로 확산이 된 것은 법원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다.

연일 폭염 온도의 최고치가 바뀌듯 판결문의 무죄 논거도 정교하고 세밀해지고 있다. 동어반복에 머무르고 있는 대법원 판결에 대해 하급심은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 또 “병역거부가 정당하지 않음을 검사가 입증을 해야 한다”라는 논리로 마치 뼈를 바르듯 칼질하고 있다.

이제 대법원이 법적인 안정성만을 이유로 현 상황을 계속 방치하는 것은 상급심의 위상에 점점 더 흠이 될 뿐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무죄 건수는 계속 쌓일 것이다. 그 법적 안정성이 구체적인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면 지금처럼 하급심의 무죄 선고 건수가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 없다. 법이 개정되어야 할 정도를 이미 넘었기 때문에 판사들이 항명성의 판결로 궐기하고 있다.

재해석의 기준은 전세계 인권지향 국가의 판결문을 참조하는 것이다. 각국의 최고 재판소의 판례는 유기적으로 교환되고 있다. 한국의 양심적 병역거부 유죄 판결문은 반민주국가에서나 원용될 수 있어도, 인권 선진국에서는 국가의 품격만 떨어뜨릴 뿐이다. 한국 사법부는 70년간 양심을 고수해온 병역거부자들에게 이런 기회를 준 것에 오히려 감사해야 한다.

돌이켜 보면 2004년 서울남부지법의 이정렬 판사가 최초로 병역거부 무죄를 선고했을 때 법원 마당에는 붉은 띠를 두른 예비역 노병들의 핏발 선 얼굴에 성토 함성이 가득했지만, 지금은 무죄 선고가 나도 일상사로 받아들여질 정도가 되었다. 오히려 무죄 판결문의 논리정연함이 병역거부에 거부감을 가진 일반인들 사이에 병역거부가 헌법적 보호 대상이라는 거대한 담론을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이참에 국방부도 국제기준에 따라 병무청이 아닌 순수 민간 부처가 주도하는 대체복무제 도입 방안을 적극 추진해야 한다. 70년간 병역거부자들을 고발한 주체였던 병무청이 대체복무를 주관해서는 안 된다. 판정에서 시행에 이르는 전 과정을 다른 부처가 관리 감독해야 한다. 이는 대체복무제도의 국제기준과도 부합되는 것으로서 무리한 요구가 아니다. 더더욱 대체복무제 편입은 국가의 시혜가 아니라 국가에 지워진 의무이기에 권리자로서 당당히 요구하는 것이다. 이는 30건 넘는 무죄 선고의 논거와도 일치한다.

만시지탄이지만 70년 인고의 세월 동안 양심을 지켜온 당사자의 한 사람으로서 하급심이 합리적인 이유를 근거로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즉 병역기피자와 병역거부자를 다르게 분류하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지체 없이 대체복무제가 도입되어 우리 자녀들이 공동체를 위해 대체복무로 기여할 수 있게 될 날이 속히 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사법 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항명성 무죄 판결로 대한민국의 사법부가 인권 지향적임을 하급심 판사들은 대내외에 천명했다. 이들은 인권 옹호 재판 역사에 각인될 것이다. ‘시기상조’라는 이유로 유예된 대체복무제 도입 반대를 일거에 ‘시기도래’로 역전시킨 막강한 판결권에 숙연해지지만, 꼭 묻고 싶은 질문, 듣고 싶은 답변이 있다. 병역거부자들의 양심은 변한 것이 없는데 어째서 법관들의 직업적 양심이 무죄 선고에 이르는 데 강산이 7번이나 변했어야만 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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