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코빈의 노동당이 주목하는 프레스턴 모델이고, 그 영감의 원천이 된 클리블랜드 모델이다. 이들 모델을 이루는 요소들, 즉 공공부문, 대형 비영리 기관, 협동조합 중 낯선 것은 하나도 없다. 이들을 하나로 잇고 아래로부터 창의성을 끌어내며 시장 경쟁 이외의 가치와 원리, 상상력을 적용하자 새 세상의 틈이 열렸다.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 전세계 진보정치에서 2017년의 인물을 꼽으라면, 1위는 단연 영국 노동당의 제러미 코빈 대표일 것이다. 6월 조기 총선을 앞두고 모든 언론이 노동당 참패를 예상했지만, 코빈의 노동당은 오히려 압승이 예상되던 보수당 의석을 줄이며 선전했다. 철도 재국유화, 대학 무상교육 등 선명한 탈신자유주의 공약을 뚝심 있게 밀고 나간 덕분이었다. 이제 영국에서는 누구도 코빈이 총리가 될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또한 그의 집권이 1979년 마거릿 대처 집권처럼 새 시대의 시작을 뜻하리라는 점을 다들 인정한다. 그래서 지지자든 반대파든 노동당 정부가 어떤 모습일지 진지하게 묻는다. 이런 물음에 코빈이 내놓는 답변 중 하나는 “프레스턴을 보라”는 것이다. 프레스턴, 낯선 이름이다. 랭커셔의 주도인, 인구 12만명의 작은 도시다. 산업혁명 중심지 중 하나였지만, 이제는 일자리 부족과 인구 감소를 걱정하는 처지다. 그러던 이 도시가 새삼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노동당 시정부가 2011년부터 야심찬 시도를 벌였기 때문이다. 시정부는 프레스턴을 잉글랜드 북부에서 처음으로 생활임금이 정착된 도시로 만들려 했다. 최저임금을 넘어 실질 최저생계비를 보장하는 생활임금 제도가 공공부문만이 아니라 민간으로까지 확산되길 바랐다. 이와 관련해 열쇠를 쥔 것은 수많은 업체와 조달 계약을 맺는 지역 내 공공 혹은 비영리 기관들이다. 지역에 정박해 있다 해서 이들은 ‘앵커’(닻) 기관이라 불리기도 한다. 예컨대 시청, 대학, 대형 병원 등이다. 이런 앵커 기관이 생활임금을 지급하면서 조달 업체에도 동참을 요구한다면, 지역 전체의 평균 임금을 끌어올릴 수 있게 된다. 시청은 우선 앵커 기관과 조달 업체의 상설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이 네트워크를 통해 임금과 노동조건 개선 방안을 합의했고, 생산 및 서비스 품질 향상, 사회적 책임성 강화 등을 논의했다. 또한 맨체스터에 소재한 지역경제전략센터(CLES)와 손잡고 각 기관 및 업체 실태를 조사했다. 조사 결과, 프레스턴 내 앵커 기관의 지출 중 60% 이상이 랭커셔 지역 바깥으로 빠져나간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프레스턴시는 애초 목표인 생활임금 제도 정착 면에서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실험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시정부는 다음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앵커 기관의 모든 조달 계약을 지역 내 업체와 맺어서 지역 경제를 살린다는 것이다. 만약 랭커셔 안에 적절한 기성 공급업체가 없다면, 새로 협동조합을 설립할 계획이다. 그래서 공공부문, 협동조합, 지역 민간기업이 상생하는 경제 생태계를 육성하려 한다. 이런 프레스턴의 실험에는 선례가 있다. 미국 클리블랜드시다. 클리블랜드도 제조업이 쇠퇴하면서 위기를 맞은 도시다. 특히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상황이 더욱 심각해졌다. 이 도시의 진보 세력은 일자리 창출과 지역 경제 회생의 실마리를 노동자가 소유하고 운영하는 생산협동조합에서 찾았다. 앵커 기관들을 잘만 활용하면 노동자 협동조합이 충분히 발전할 수 있다고 봤다. 2009년에 설립된 에버그린 세탁 협동조합이 이를 입증했다. 이 협동조합은 클리블랜드에서도 실업, 빈곤 문제가 가장 심각한 구역의 주민들을 중심으로 결성됐다. 에버그린 협동조합은 클리블랜드의 대표적 앵커 기관인 대형 병원의 세탁 업무를 맡았다. ‘에버그린’이라는 이름에 어울리게 이들은 저탄소, 친환경 원칙에 따른 세탁 서비스의 모범을 보이며 지금까지 영업 중이다. 에버그린 세탁 협동조합이 성공하자 여러 분야에서 계속 노동자 협동조합이 결성돼 현재는 10여 업체에 이른다. 이것이 코빈의 노동당이 주목하는 프레스턴 모델이고, 그 영감의 원천이 된 클리블랜드 모델이다. 이들 모델을 이루는 요소들, 즉 공공부문, 대형 비영리 기관, 협동조합 중 우리에게 낯선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이들을 하나로 잇고 아래로부터 창의성을 끌어내며 시장 경쟁 이외의 가치와 원리, 상상력을 적용하자 새로운 세상의 틈이 열렸다. 우리라고 다를 게 없다. 2018년은 지방선거의 해다. 많은 이들이 이번 지방선거가 시대에 뒤떨어진 세력을 심판하는 기회가 돼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새 시대를 앞당기는 기회이기도 해야 한다. 한국판 프레스턴, 클리블랜드가 모습을 드러내는 계기가 돼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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