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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장석준, 그래도 진보정치] 평등 공화국을 여는 개헌

등록 2018-03-01 17:25수정 2018-03-01 19:06

제헌국회에 비록 독립운동가 중 일부만 참여했다 하더라도 해방 전에 합의한 새 나라의 지향은 헌법안 토론 속에 계속 살아 있었다. 그것은 바로 평등 공화국이었다. 그래서 제헌헌법에 선명히 박힌 것이 “농지는 농민에게 분배한다”는 제86조의 간단명료한 한 문장이었다.
장석준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

어제는 아흔아홉 번째 삼일절이었다. 내년이면 3·1운동 100주년이라니 감회가 새롭다. 게다가 촛불 이후 개헌이 논의되는 상황이어서 올해 삼일절은 더 뜻깊게 다가왔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이 3·1운동을 언급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가들이 3·1운동을 준비하며 발표한 독립선언들이야말로 우리 헌법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가장 많이 알려진 선언문은 물론 서울에서 낭독된 ‘기미독립선언’이다. 하지만 독립운동가들의 육성을 가감 없이 정확히 전달하는 것은 조소앙이 집필한 ‘무오독립선언’이다. 이 선언문은 만세운동 시작되기 한 달 전인 1919년 2월1일에 해외 각지에서 발표됐지만, 음력을 따라 ‘무오선언’이라 불린다.

그중 한 대목을 요즘 말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모든 동포에게 동등한 권리와 부를 보장하며 남녀와 빈부의 불평등을 철폐하고 학력과 연령에 상관없이 동등한 지식과 건강을 실현해 온 인류를 포용하는 것이 우리 건국의 깃발이다.” 독립한 새 나라가 정치적 권리의 평등뿐만 아니라 경제적 평등을 실현해야 한다고 못 박은 것이다. 게다가 지식과 건강까지 평등해야 한다고 한다.

이미 100년 전에 독립운동가들은 이렇게 새 나라 대한민국은 철저한 평등 공화국이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이 정신은 임시정부가 제2차 세계대전 와중인 1941년에 충칭에서 발표한 ‘대한민국 건국강령’에도 고스란히 이어진다. 그 일부를 역시 현대어로 풀어보면, 이렇다. “보통선거 제도를 실시해 정치 평등을 이루고, 토지와 기업의 국유 제도로 경제 평등을 이루며, 국가가 교육비를 책임져 교육 평등을 이룬다.”

이번에도 집필자는 조소앙이었다. 그러나 무오독립선언과 마찬가지로 한 개인의 견해만은 아니었다. 조소앙이 정치 평등, 경제 평등과 나란히 교육 평등을 3대 과제로 제시한 연유만 봐도 그렇다. 1929년에 전남 광주를 시작으로 전국에 걸쳐 학생들의 항일 항쟁이 벌어졌다. 조소앙은 국외에서 이 소식을 접한 뒤부터 교육 평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이렇듯 항일운동의 모든 경험이 어우러진 결과가 ‘건국강령’ 속 평등 공화국의 모습이었다.

이는 1948년 대한민국 제헌국회에서 다시 한 번 확인됐다. 안타깝게도 첫 국회에는 독립운동의 모든 흐름이 다 참여하지 못했다. 그러나 제헌국회에 비록 독립운동가 중 일부만 참여했다 하더라도 해방 전에 합의한 새 나라의 지향은 헌법안 토론 속에 계속 살아 있었다. 그것은 바로 평등 공화국이었다.

그래서 제헌헌법에 선명히 박힌 것이 “농지는 농민에게 분배한다”는 제86조의 간단명료한 한 문장이었다. 이 조항은 이후 새 정부가 구성되자마자 농지개혁에 나서는 강력한 근거가 됐다. 이 한 문장의 합의를 바탕으로 수천 년 묵은 불평등이 뒤집어졌다. 대한민국은 이렇게 소유 불평등을 정치를 통해 해결하는 벅찬 경험을 하며 만들어진 나라다.

오래된 불평등만이 아니었다. 자본가와 노동자의 새로운 불평등을 놓고도 제헌헌법은 나름의 해결 방향을 제시했다. 그것이 제18조의 유명한 이익균점권이다. 노동자가 사기업 이익을 균점할 권리가 있다는 내용이다. 애초에는 이익균점권뿐만 아니라 노동자 경영참여권까지 담자는 주장이 많았다. 비록 논란 끝에 경영참여권은 빠졌지만, 제헌헌법이 기업을 바라보는 관점은 이렇듯 명확했다. 주주뿐만 아니라 노동자도 기업의 주인이라는 것이었다.

이 모두가 다 지나간 과거일 뿐일까? 아니다. 차라리 과거 속에 숨은 혹은 가려진 미래라 해야 한다. 평등의 이상은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더욱 절실한 요청이 되고 있다. 과학기술 발전으로 만인의 자유를 실현할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고 있지만, 특권과 불평등의 낡은 질서가 이를 가로막기 때문이다. 일제에 맞서며 키워온 평등 공화국의 꿈이야말로 이런 현실을 돌파할 확실한 처방이다.

촛불 개헌은 바로 이런 과거 속 미래를 되살리는 계기가 되어야만 한다. 보통사람들의 살림살이와 직결된 문제들에 대해 평등 공화국의 처방을 분명히 하는 출발점이 돼야 한다. 정의당 개헌안이 노동자 경영참여권 신설과 이익균점권 부활, 의무교육 확대, 토지 투기 방지와 주거권 보장을 위한 국가 책임 등을 담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년, 3·1운동 100주년은 21세기에 맞게 건국정신을 되살린 새 헌법과 함께 맞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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