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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2030 잠금해제] 예언가들 / 홍승희

등록 2018-03-18 17:56수정 2018-03-18 19:13

홍승희
예술가

나를 가해했던 사람의 에스엔에스(사회관계망서비스)에 미투운동을 다룬 기사와 앞으로 여성운동이 어떻게 될지 분석하는 게시글이 올라와 있다. 평정심이 있는 그는 좋겠다. 가만히 앉아서 미투운동을 감상하고 분석하고 예언할 수 있는 그들은. 내 말은 너무 뜨거워서 뱉고 나면 비명으로 읽힐 거니까.

휴대폰 화면에 나타나는 에스엔에스 타임라인이나 포털사이트 기사, 댓글난을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고통을 증언하는 피해자와 그의 삶을 ‘불쌍하다’고 환원해버리는 시혜적 말들, 공작 운운하는 예언과 예언 적중, 선견지명이라 평가되는 이상한 말들, 자본과 국가권력에서 약자인 자신은 절대 가해의 여지가 없다는 듯 바깥으로만 향하는 비난과 자기확신의 말들이 스크린을 채운다.

나를 가해한 그들의 공통점은 내가 권위를 주고 있던 관계라는 점이었다. 나의 멘토, 스승을 자처하던 그들은 이 사회의 예언가들이다. 나는 그들을 믿는 신자였고 그들은 나를 신도쯤으로 여겼을 거다. 신의 폭력은 폭력이 아니라 의식이고 문화가 된다. 그날 그가 내 몸을 완전히 통제하려던 ‘강간’은 그런 의식의 연장선이다. 그래서 그는 아직도 자신이 한 일이 사랑의 행위, 숭고한 의식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거다. 이상한 권력관계와 오래된 폭력이다.

그들은 확신의 언어로 예언을 하고, 타인의 증언을 분석하고 분류한다. 전지전능한 객관의 관점에서 자신이 짐작하는 뒤편의 진실을 널리 알려야 한다고 느낀다. 타인의 고통이 쏟아져 나오는 와중에 ‘예언’할 수 있는 권력은 거기서 나온다. 여자가 내뱉는 고통의 증언은 이명박 전 대통령의 비리 폭로보다 중요하지 않은 것인가. 어떤 폭로는 온전한 사회문제가 되고, 어떤 폭로는 공작의 우려를 낳는다. 예언가의 이런 뒷짐 진 권력이 몸의 이야기를 가로막아온 적이다.

그들은 말과 언어로 타인을 짓누르고 통제한 후 몸으로 진압한다. 그런 권력욕은 누구에게나 있다. 신에게 기대고 싶은 욕망만큼이나 자신이 누군가에게 신이 되고 싶은 욕망이다. 현대 사회에서 신은 정치 영웅, 스타 상품, 유명한 개인이다. 유명한 인사가 저지른 성폭력 사건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느낀 배신감은 일종의 종교적 배신감으로까지 느껴진다. ‘저 사람만은 믿었는데’, ‘저 사람만 가지고 도대체 왜’라고 말하는 소리들이 들린다. 몇몇 유명한 가해자들이 연일 뉴스에 보도되는 동안 다른 평범한 가해자들은 면죄부를 얻는 걸까. 그들의 권력이 추락하는 것을 보며 느끼는 쾌락과 동정의 감상평만 남고, 자신의 일상은 뒤돌아보지 않는 태도는 익숙하다. 스크린 속을 구경하고 응원만 하지 말고 내가 권위를 주던 존재와 말들은 무엇이었는지, 내가 오늘 누리는 권력은 없는지 곱씹어봐야 하지 않을까.

‘근절’되거나 없어지는 사회문제는 없다. 얼굴만 바꾼 신과 신도들의 상호작용은 계속된다. 몸을 통제할 권력은 몸 아닌 것에 있어왔다. 한 명의 신, 혹은 신들이 모셔지는 집단적 신들에게 기댈 생각 없다. 그런 이상한 신화로 건설된 구조와 상호작용 자체가 부서지길 바란다.

고통이 말해지는 과정 자체가 소중하다. 그것이 권력의 꼭대기를 건드리거나 권력의 뿌리를 건드리는 말이어서가 아니라, 유일하게 살아 있는 말이라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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