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정봉주 전 의원은 보도자료를 발표하면서 고소를 취하하는 등 여러 조치를 취했으나 “저는 이 사건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습니다”라고 여전히 주장하고 있다. 정 전 의원 사건의 진실을 가리는 데 혈안이 된 일련의 소동을 보며 과연 폭력의 책임과 윤리를 고민해온 역사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운 것일까 자문할 수밖에 없었다. 페미니즘을 비롯한 폭력 비판 이론은 폭력의 경험을 주관적 기억의 차이로 전도하는 부정 방식에 대항해 이론과 실천을 구축해왔고, 특히 고통과 기억의 물질성에 대한 논의는 대표적이다. 폭력의 시간이 지나고도 피해자의 몸에 남겨진 고통은 수치심으로 전도되고, 폭력을 실행한 가해자의 망각과 공감의 부재는 피해자를 이중의 수치심에 휩싸이게 한다고 프리모 레비는 말했다. 레비가 고통의 물질성과 신체에 남겨진 기억의 끈질긴 힘을 탐구한 것은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연이은 자살을 해명해보려는 최후의 시도이기도 했다. 폭력의 경험이 ‘객관적 구체성’으로 인정되지 못할 때 폭력은 피해자의 몸에 머물러 몸의 물질성을 끝내 휘발시킨다. 즉 폭력은 신체의 물질성과 분리되어 기억되지도, 남겨지지도 않는다. 트라우마란 신체에 남겨진 검은 구멍이고, 성폭력 피해자에게 기억은 온몸으로 체현된다. 그런데 어떻게 가해자들은 성폭력 사건을 신체의 물질성과 분리해 온전히 ‘기억/의식’으로 환원할 수 있을까? 페미니즘은 기억을 의식의 작용으로 환원해온 자유주의적 관념론을 비판하는 사상적 실천을 통해 폭력의 기억과 신체의 물질성에 대한 특유의 유물론적 이론을 구축했다. 페미니즘을 부르주아 관념론이라 오래 매도해온 자칭 진보주의자들이 미투 국면에서 스스로 관념론과 정신혁명에 기꺼이 투신하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성폭력 사건이 거의 언제나 ‘진실 공방전’처럼 보이는 것은 폭력의 기억을 신체의 물질성에서 분리하고 허상으로 만든 결과다. 피해자의 물질적인 있음 그 자체가 증거가 되지 않고, 가해자의 기억나지 않음이 증거가 되는 것은 의식의 주체-남성이 모든 물질적으로 차이 나는 신체들에 앞서, 특권적 자리를 차지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기억을 둘러싼 공방전이란 실은 성폭력 사건이 탈신체화된 의식의 자기 확신을 통해 구축되는 근대-남성-보편 주체의 정신혁명을 반복하는 터전이 되어버린다는 뜻이다. 하여 미투 운동은 진실 공방으로 피해자임을 입증하거나 ‘정치적 올바름’을 교육하는 것이 아니다. 미투 운동은 의식 주체의 관념론을 ‘진보’로 떠받드는 가상을 깨부수는 발본적 유물론의 정치를 제창하고 있다. 미투 고발을 정보 흐름을 들여다보는 ‘통찰력’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김어준의 논의 방식은 존재의 물질성에 대한 의식의 우위를 확신하는 관념적 정신혁명론의 전형이다. 음모론과 이면의 정보를 통해 물질적 현실의 이면을 밝힌다는 이들의 정보 숭배는 그런 점에서 신체의 물질성을 제거한 가상-리얼리티에 대한 열광과도 맞닿아 있다. <우리는 어떻게 포스트휴먼이 되었나>에서 캐서린 헤일스는 인간의 의식을 신체에서 분리하여 컴퓨터에 이식할 수 있다는 식의 포스트휴먼에 대한 열광은 자아를 신체의 물질성에서 분리하고 그런 의식의 주체를 보편으로 특권화한 근대 자유주의 주체관을 계승한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미투 운동의 도래는 이러한 의식 주체의 정신혁명과 대결해온 페미니즘 정치사상과 발본적 유물론의 궤적 속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 정신혁명의 상속과 계승이 ‘혁명’의 자리를 독식하는 바로 이 시점에서 봉기한 미투 운동이야말로 지금까지 한 번도 도래하지 않은 신체의 유물론 정치, 그 발본적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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