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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시론] 반도체 작업환경 보고서가 기업비밀이 아닌 이유 / 박동욱

등록 2018-04-23 18:41수정 2018-04-23 19:04

박동욱
한국방송통신대학교 환경보건학과·전 산업보건학회장

법원과 국민권익위원회의 중앙행정심판위원회가 최근 삼성전자의 작업환경측정 보고서 공개를 보류해달라는 삼성전자 쪽의 정보공개 집행정지 신청을 받아들였다. 이 보고서 내용이 기업비밀을 유출할 우려가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앞서 대전고등법원이 삼성전자의 작업환경측정 보고서에는 기업비밀로 볼 수 있는 내용이 없다고 판결한 것과 정반대다. 당분간 암 등에 걸린 반도체 노동자는 과거에 일했던 공정, 취급했던 화학물질 성분과 노출 수준 등에 대한 정보를 받을 수 없게 됐다. 이들의 산업재해 입증이 또다시 가로막혔다.

작업환경측정 보고서에는 특정 시기 노동자의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일부 공정에서 화학물질 등 위험인자에 대한 노출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노동자가 질병에 걸렸을 때 산업재해를 입증할 실마리가 되는 유일한 정보들이다. 삼성은 보고서에서 몇가지 정보를 조합하면 기업비밀을 추정할 수 있다고 한다. 작업환경측정 조사자는 단지 기업이 준 자료와 정보를 근거로 공정을 파악하고 특정 장소에서 측정만 할 뿐이다. 기업비밀이란 경쟁자가 알게 될 경우 기업의 경쟁력에 치명적 피해를 줄 수 있는 정보여야 한다. 그런데 작업환경측정 보고서에는 노동자의 알권리를 막을 정도의 기업비밀 정보는 없다. 국가기밀 유출이라고 하는 대목에서는 할 말을 잃었다. 일부 정보가 정말로 기업비밀이 될 수 있는지 따져보자.

첫째, 측정 위치도이다. 이는 산업안전보건법 시행규칙에서 정해놓은 작업환경측정 보고서 서식 명칭이다. 조사자가 측정한 지점을 알아볼 수 있도록 임의로 그린 평면도다. 세모, 네모 등으로 기계나 공정 위치를 손 글씨로 표시한 그림에 불과하다. 기업비밀과 관련될 수 있는 기계 모델, 수, 배치, 공정 흐름, 자동화 수준 등을 알 수 있는 정보가 없다. 수천개의 반도체 공정 중 일부만을 나타내는 정도다. 이는 마치 벽돌 몇조각의 모양으로 건축 설계도를 추정할 수 있다는 논리와 같다.

둘째, 공정별로 사용하고 있는 화학물질 성분과 월 사용량이다. 이는 노동자의 생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부 화학물질에 대한 정보이고, 이 또한 모두 기업이 조사자에게 준 것이다. 작업환경측정 보고서에 기록된 공정 흐름과 사용된 주요 화학물질 성분은 인터넷과 문헌 등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정보다. 첨단 반도체 산업에서 특정 시기에 조사한 화학물질과 사용량 자체가 기업비밀인 경우는 없다. 다른 화학물질과의 혼합 비율, 공정 조건, 공정 운전 방법 등에 대한 정보가 있어야 비밀이 될 수 있다. 알코올을 사용했다고 해서 소주 제조 기법을 추정할 수 없는 것과 다르지 않다.

작업환경측정은 직업병 예방과 판정에 매우 중요한 법적 장치다. 1980년부터 시작된 이 제도로 기업비밀이 유출된 적은 없었다. 외국에서도 노동자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더욱 엄격한 화학물질 정보 공개와 노동자의 알권리 등을 법으로 강제하고 있지만 기업비밀로 문제가 된 적은 없었다. 기업비밀은 시장경제의 근간을 이루므로 법률로 보호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사람의 생명에 치명적 손상을 줄 수 있는 화학물질이 들어 있는 기업비밀이 있다면 보호할 가치가 없다는 것은 상식이다. 생명권은 천부적인 권리다.

삼성이 쌓아온 기업비밀 수준이 작업환경측정 보고서의 몇가지 정보로 추정할 수 있을 정도로 낮다고 보지 않는다. 삼성은 반도체 산업 부문에서 세계 선두에 서 있고 국가 경쟁력을 이끌고 있다. 그렇다고 삼성이 주장하는 모든 정보가 기업비밀이 될 수는 없다. 작업환경측정 보고서에 들어 있는 어떤 정보가 어떤 조합으로 어떻게 기업비밀이 될 수 있는지 이 분야 전문가로서 정말 이해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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