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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박찬수 칼럼] 트럼프의 행운을 빌 수밖에

등록 2018-05-09 18:35수정 2019-03-01 11:27

지난주, 오랫만에 찾은 워싱턴의 날씨는 최근의 미묘한 북-미 상황을 대변하듯 변화무쌍했다. 5월에 어울리지 않는 찬 바람이 포토맥 강가를 휘감더니, 금새 온화함을 되찾고 기온을 초여름으로 밀어올렸다. 워싱턴 정치도 소용돌이치긴 마찬가지였다. 4월 말 등 뉴스채널을 사로잡은 판문점 남북정상회담 소식은 곧바로 트럼프 대통령의 ‘러시아 스캔들’, 존 켈리 백악관 비서실장과의 불화설로 뒤덮였다. 북-미 정상회담 전망 기사 뒤로 길게 이어진 의 국내정치 뉴스엔 이런 자막이 붙었다. ‘트럼프, 신뢰의 위기에 직면하다.’

한국의 보수 야당과 언론은 ‘전세계가 김정은에게 속고 있다’며 그의 진정성을 의심하지만, 정작 워싱턴에서 신뢰의 위기에 봉착한 건 트럼프 대통령인 듯 싶었다. 남북한과 미국의 세 지도자 가운데 평화를 향한 진정성을 가장 인정받는 이가 문재인 대통령이란 데엔 워싱턴의 한반도 전문가들 의견이 일치했다. 북-미 협상이 몹시 지난할 수밖에 없고, 그럴 수록 한국정부의 역할이 중요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미 행정부와 의회, 싱크탱크에서 만난 한반도 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하면, 최근 상황을 둘러싼 몇가지 쟁점을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우선, 한-미 정부의 정보 공유는 높은 수준이고 국내 일부에서 주장하듯 문 대통령과 트럼프 사이에 균열이 생겼다는 근거를 찾기는 어려웠다. 미 정부 관계자는 “문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 결과를 트럼프 대통령에게 아주 자세하게 설명했다”며, 한국정부가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일부의 추측을 일축했다. 빌 클린턴 행정부에서 국무부 부차관보를 지낸 핵군축 전문가 게리 세이모어(하버드대 케네디스쿨 벨파센터 소장)는 “문 대통령이 트럼프를 설득한 게 주효했다. 그런 뒤엔 트럼프가 직접 북한에게서 비핵화의 가능성을 확인했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곧 있을 북-미 정상회담은 그런대로 잘 되겠지만 그 이후의 비핵화 과정이 순탄하진 않을 것이라는 데 대체적인 전망이 일치했다. 북한이 과연 핵을 포기하겠냐는 의구심이 워싱턴엔 여전히 강한 듯 보였다. 군사분계선을 넘어와 하루종일 텔레비전 생중계 앞에 자신을 노출시킨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파격적 행보를 평가하면서도, 북한 정권에 대한 불신의 시선을 거두진 않았다.

좀더 직접적으로는, 미 국내에서 정치적으로 몰리는 트럼프 대통령의 ‘신뢰의 위기’가 있다. 트럼프의 북-미 정상회담 추진을 미덥지 않아하는 건 민주당 뿐 아니라 공화당 주류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민주당은 ‘협상을 통한 핵문제 해결’이라는 기존 노선 때문에, 공화당은 11월 중간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트럼프를 대놓고 반대하진 않는다. 미 상원 외교위원회의 민주당쪽 인사는 솔직하게 이렇게 말했다. “만약 오바마 정권에서 북-미 정상회담을 추진했다면 공화당은 난리를 쳤을 것이다. 그에 비하면 우리(민주당)는 트럼프의 접근(대북 협상)에 딴지를 걸지 않는다. 물론 그 진의를 믿는 것은 절대 아니다.”

게리 세이모어 소장은 “미국이 북한의 핵미사일로부터 안전해진다면, 그걸 싫어할 미국민은 아무도 없다”고 말했다. 북-미 정상회담 성공이 11월 중간선거에서 트럼프와 공화당에 도움을 줄 것이란 뜻이다. 대북 강경파가 오히려 대북 협상을 통해 정치적 이익을 즐기는 ‘트럼프의 역설’인 셈이다.

트럼프는 8일(현지시각) 오바마 행정부가 심혈을 기울이고 유럽 동맹국들이 참여했던 이란 핵 합의를 아무렇지도 않게 깨버렸다. 그러면서 ’역대 어느 대통령도 하지 못한 일(북핵 폐기)을 하겠다’며 김정은 국무위원장과의 회담을 앞에 두고 있다.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이란 핵 합의 파기는) 북한에 분명한 신호를 보낸 것”이라고 말했다. 전임 대통령이 한 약속은 손쉽게 깨뜨리면서, 오직 나와의 약속을 어기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트럼프를 어떻게 봐야 할까. 정말 ‘진정성’을 물어야할 사람은 김정은이 아니라 트럼프라 해도 할 말이 없다.

문득 1970년대 누구도 손대지 않던 뉴욕 코모도 호텔을 재건축해 ‘트럼프 신화’의 첫 불꽃을 쏘아올렸을 때의 그를 떠올린다. 그때 트럼프는 최상의 결과를 미리 선전하면서 실제로는 낮은 수준의 현실적 타협을 감수했다. 북핵 협상도 마찬가지다. 이란 핵 합의를 깨듯이 북한 핵 문제에 접근해선 곤란하다.

어쨌든 지금은 ‘트럼프의 행운’을 빌 수밖에…

논설위원실장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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