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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시론] 헌재에서 낙태죄 폐지를 외치다 / 김수정

등록 2018-05-28 18:30수정 2018-05-28 19:09

김수정
변호사

지난 24일 헌법재판소 대법정에서 낙태한 여성을 처벌하는 우리 형법이 위헌인지 여부를 심사하는 공개 변론이 열렸다. 2012년 헌재에서 4대4로 6명의 위헌 정족수를 채우지 못하고 합헌이 결정된 후 6년 만이다. 나는 청구인 측 공동대리인단의 일원으로 참여하였다. 세 시간여 치열한 변론의 마지막, 5분으로 제한된 구술변론의 기회가 주어졌다. 나는 내게 주어진 5분의 시간 동안, 정돈된 법률논리보다 날 것의 현실을 다음과 같이 외쳐보고 싶었다. 최고의 변론은 여성의 현실 그 자체이므로.

“법무부는 의견서에서 자유로운 성행위의 책임 운운하면서 낙태죄 폐지에 찬성하는 여성을 성행위를 즐길 뿐, 책임을 지지 않는 존재로 폄하하였습니다.

출산이 강요되는 우리 사회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준비된 임신의 경우에도 여성은 임신 사실 자체로 해고되는 경우가 빈번하고, 경력단절과 과로로 인한 유산의 위험 등 차별적 현실에 노출됩니다. 미혼모의 임신은 어떻습니까. 미성년자의 임신은 어떻습니까. 임신, 출산, 양육 모든 과정에서 온갖 비난과 사회적 차별을 감내해야 하고 영아 유기, 영아 살해에 노출되기도 하며, 출산한 자녀를 입양 보내야 하는 등의 재앙적 미래를 감당해야 합니다. 불가피하게 낙태를 선택하는 여성은 또 어떻습니까. 합법적인 의료서비스의 도움을 받지 못해 불법 시술을 하다 목숨을 잃기도 하고, 낙태 시술 후에도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 각종 질환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이처럼 낙태를 해도 출산을 해도 모든 고통을 감당해야 합니다.

또 다른 주체인 남성은 어떻습니까. 무엇을 감당하고 있습니까. 여성이 출산한 경우 동등하게 아이를 양육하고 있습니까. 미혼부의 4.7%만이 양육비를 지급하고 있는 현실은 어떻습니까. 낙태로 인한 처벌을 함께 받습니까. 낙태로 상한 여성의 신체와 정신이 치유될 수 있도록 함께 하고 있습니까. 국가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미혼모에 대한 차별이 없어지도록 했습니까. 미혼모 등이 아이를 양육할 수 있는 충분한 재원을 지원했습니까. 임신한 여성, 출산한 여성이 계속 공부를 하거나 노동을 할 수 있도록 충분한 사회적 여건을 조성했습니까.

한국사회에서 여성은 출산조차도 선택하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딸을 임신했다는 이유로 낙태를 강요당하고 있고, 남자 파트너가 원치 않는다거나 장애 여성이라는 이유로 낙태를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국가는 태아의 생명이나, 임부의 건강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구 조절을 위해 낙태를 조절해왔습니다. 임신의 유지든 낙태든 이를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사회 구조 속에서 여성들은 이중 삼중으로 고통받아 왔습니다.

법무부는 의견서에서 임신과 출산은 가히 ‘기적’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한국사회에서 여성의 임신과 출산이 과연 생명의 탄생이라는 이유만으로 기적이라고 찬양될 수 있는 것입니까. 여성이 스스로의 결정에 따라 임신과 출산을 통제하지 못하는 한 어쩌면 그것은 기적이라기보다 천형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재앙적 미래를 감당해야만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임신과 출산이라면 그것을 어찌 기적이라 부를 수 있겠습니까.

이진성 헌법재판소 소장께서도 말했다시피, 태아의 생명에 가장 큰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바로 임신한 여성입니다. 그런 임신한 여성이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낙태를 선택하는 경우 이 선택을 태아의 생명과 충돌하는 가치로만 보는 대결구도를 이제는 넘어서야 합니다. 진정 태아의 생명을 존중하고자 한다면, 낙태한 여성을 처벌할 것이 아니라 임신한 여성이 출산을 선택할 수 있도록 권리보장적 법과 제도를 구축해야 합니다. 불가피하게 낙태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경우에는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낙태죄의 존재는 태아의 생명을 보호하고자 하는 목적을 달성하기는커녕, 여성에게 원치 않는 임신의 유지와 출산을 강요하여 극심한 차별과 희생을 감당하게 하였을 뿐입니다. 임신과 출산에서 여성이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는 한 성평등한 사회의 구현은 불가능합니다.

법무부는 위헌 판단이 아닌 입법으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라고 하나 국회가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증명되었습니다. 미국 연방대법원 등 여러 나라의 최고 법원에서 낙태죄에 대한 위헌을 선언한 예가 있습니다. 헌재는 더 이상 이런 위헌적 상황을 외면하여서는 안 됩니다. 지금까지 위헌을 결정한 많은 예에서 그랬듯이 정연한 헌법적 논리로 위헌을 선언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25일 헌법에 낙태를 금지할 수 있는 근거 조항을 명시해 두고, 낙태한 여성을 최대 징역 14년까지 처벌하도록 하였던 아일랜드는 국민투표로 낙태 금지조항을 폐지하였다. 국민의 64%가 투표에 참여하여 66.4%가 찬성한 압도적인 결과다. 아일랜드의 낙태법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낙태처벌법 중 하나였다. 아일랜드 여성들은 그들의 삶을 옥죄던 잔혹하고 굴욕적인 족쇄하나를 벗어던졌다. 대한민국의 여성들에게도 멀리 않은 미래의 성취라 확신한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무엇이든, 여성이 스스로 임신과 출산을 결정하고 자기 운명을 통제할 권리는 인간으로서 존엄하게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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