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오래전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는 가파른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어 등굣길이 만만치 않았다. 그런데도 단화를 신어야 한다는 복장 규율을 철칙으로 삼고 있었다. 실로 비실용적인 교칙에 불만이 많았던 나는 학교 홈페이지 게시판에 단화를 신는 것이 얼마나 불합리한가를 익명으로 호소하였고, 운동화를 신을 수 있게 해주기를 요청하면서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냐는 논지로 글을 끝맺었다. 며칠 뒤 수업을 하러 오신 국어 선생님께서는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식의 사고방식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학생들 앞에서 강조하셨다. 아마 그 글을 올린 이가 누군지 알고 그러셨을 게다. 운동화를 신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음을 피력하기 위해 그 수사를 사용하였던 나로서는 선생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꽤나 반감을 품었다.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내가 올렸던 글의 정당함에 대한 확신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이들과 종종 부딪치게 되면서 그 수사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가 많아졌다. 이와 같은 사고방식은 특히 정치인들이나 정치계를 판단할 때 가장 활발히 작동하는 듯하였다. 같은 맥락에서 동원되곤 하는, ‘정치인들 다 거기서 거기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는 식의 논리는 구태의연한 정치인들을 지지해주는 강력한 명분이 되었다. 그러나 과연 정치인들이 거기서 거기이기 때문에 아무나 지지해도 되는 것인지, 혹은 아무 정치인이나 지지해온 무책임의 귀결로 거기서 거기인 정치인들만 국회에 모이게 된 것인지, 그 선후관계는 곰곰이 따져보아야 할 일이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사고방식이 위험하다는 국어 선생님의 지적을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그것이 구습을 아무런 성찰도 반성도 없이 관성적으로 견인함으로써 구습의 지속에 가장 크게 기여하기 때문이리라. 그렇다면 아무 정치인이나 지지해온 이들이 구습의 가장 중대한 담지자인가 하면 이 또한 따져볼 일이다. ‘정치인들 거기서 거기다’라는 발언보다 더욱 악독한 것은 그 낡은 담론에 강제로 생명력을 불어넣어 마지막 단물까지 빨아먹으려는 일부 시대착오적인 언론들과, 이에 적극적으로 기대어 정치생명을 기어이 이어가려는 무능한 인사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근대 민주주의의 한계로 진단되기도 하는 정당정치의 사실상의 실패 또한 함께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뭇 정치인들이 선거철마다 야당에서 여당으로, 이 야당에서 저 야당으로 메뚜기처럼 옮겨 다닐 수 있는 것은 정당 간의 입장이 선명히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니 말이다. 이 모든 게 어우러져 정치계의 구습을 지탱시켜온 셈이다. 여느 선거가 그러하듯이 6·13 지방선거 또한 좌우 여야를 막론하고 구습에 기대어 목숨을 연명하는 이들을 정치적으로 단죄하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단 한번의 표심으로 세상이 당장에 상전벽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 지금의 정치 시스템은 그 한계가 분명하다. 그러나 다수의 의견이 모이면 모일수록 의미 있는 균열을 낼 가능성 또한 커진다. 나아가 그것이야말로 정치가 더는 거기서 거기가 아니도록 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단초가 된다. 투표는 단순히 물리적으로 한 표를 행사하는 행위에 그치지 않고, 정치 지형을 재편함으로써 그것이 삶에 불러올 영향까지 가늠하는, 실로 비평적인 실천이기도 하다. 투표가 비평이 될 때 정치는 더 이상 거기서 거기이지 않게 될 것이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