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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 한국사회] 혐오의 말과 어깨동무 / 김원영

등록 2019-01-28 18:13수정 2019-01-29 13:55

김원영
변호사·<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저자

고등학교 친구 천명륜은 2000년대 초반 유행처럼 번지던 ‘펌프’의 대가였다. 오락실 바닥에 놓인 기기판을 어두운 피부의 그가 음악에 맞춰 정확히 밟으며 춤을 출 때, 날렵하고 긴 다리는 <정글북>에 나오는 검은 표범 바키라를 연상시켰다. 그는 몸쓰기의 전문가였다. 나는 계단과 언덕이 가득한 고등학교에서 몸을 쓸 여지가 없어 머리를 쓰는 데만 관심을 두었다. 정반대의 인간이었던 우리는 어쩐 일인지 룸메이트가 된 이후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다.

자율학습을 빠지고 떡볶이를 사 먹으면서도, 우리가 왜 그토록 친했는지 당시에도 지금도 분명하지 않다. 그는 내 앞에서 “형, 이거 ‘애자’ 같지 않아요?”라는 말을 꺼낸 적도 있었다. 저놈이 도대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거지? 나는 천명륜의 도움으로 언덕과 계단이 가득한 고등학교를 마칠 수 있었다. 둘이 다툰 날에도, 내가 재수 없어 보이는 날에도, 나를 학교 언덕 아래 두고 그 혼자 올라가는 일은 없었다.

에스엔에스(SNS)식의 구독(팔로)관계라면 ‘애자’라는 말을 쓰는 천명륜을 단칼에 차단했을 터다. 사실 그런 타인과 피곤한 시간을 보낼 이유가 없다. 에스엔에스, 유튜브, 넷플릭스에 흥미로운 콘텐츠와 타인들이 가득하다. 직접 만나야 한다면 오로지 매력적이고, 나의 이익에 도움이 될 사람만 선택하면 된다. 성적 긴장감을 채워줄 사람, 중대한 정보를 교류할 사람, 같이 있으면 어처구니없이 웃기는 사람, 정치적으로 나와 입장이 완전히 동일한 사람. 소중한 시간을 어르신들의 재미없는 이야기를 듣고 학교 언덕을 밀어주지 않으면 올라가지도 못하는 친구를 만날 이유가 없다.

일본은 2013년부터 5년간 25억엔을 투자해 돌봄(개호)로봇을 개발했고 건강보험도 적용한다. 로봇은 변덕을 부리지 않고 일관되게 사람을 돕는다. 용변처리같이 민감한 부분을 부탁하기도 쉽다. 천명륜이 로봇이었다면 나는 훨씬 편하게 학교생활을 했을 것이다. 로봇은 내 앞에서 “애자” 같은 말을 하지도 않는다. 그동안 누군가의 손발에 의지했던 사람들도 더는 타인이 필요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일상적으로 누군가와 만날 필요가 적을 때, 우리의 관계는 자신의 도덕적·정치적 입장과 경제적·성적 이해관계로 선별된 ‘청결한’ 인적 네트워크로 재편된다. 에스엔에스에서는 그렇게 유지할 만도 하지만 실제 관계도 그렇게 재편되고 있다. 수많은 베스트셀러들은 그렇게 해도 좋다고 위로한다. “무례한 사람”에게 대처하라. 꼰대들에 맞서라. 혐오주의자들을 차단하라. 너무 타인을 배척한 것 같나요? 괜찮아요. 우선 당신을 지키세요.

혐오와 차별의 태도, 언어에 맞서는 일은 중요하며 그 과정에서 우리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 위의 조언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나도 천명륜이 뇌성마비 장애를 흉내내는 모습을 우연히 보았고 피곤한 싸움을 했다. 그러나 현실은 도덕적으로 청소된 언어와 이미지 공간보다 더 복잡하다. 분명 천명륜은 소수자에 대한 관심이라고는 “1도 없는” 사람이었고 그 점에서도 나와 완전히 달랐다. ‘어쩌다 보니’ 같은 방을 쓰게 되어 우리는 늘 몸과 몸으로 붙어 있어야 했다. 그 과정은 갈등, 대립, 교섭의 연속이었다.

그는 2003년 불의의 사고로 죽었다. 블로그의 마지막 게시물에 그가 적었다. “같이 걸을 때 가끔 원영이 형과 어깨동무를 한 채 걷고 싶다. 그런 적이 없고 그럴 수도 없을 것이다. 대신 휠체어 손잡이로 그 느낌이 전해져오기도 하여, 형의 뒤에서 뒷머리를 바라보며 같은 눈높이에서 세상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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