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 평양에서 하노이까지 왕복 7천㎞를 달린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기차여행은 왠지 안쓰러워 보였다. 대륙 종단 열차의 낭만이나 서사보다는, 2500만 북한 인민의 운명을 안고 달린다는 고뇌 같은 게 느껴졌다. 영화 <설국열차>처럼 시대와 동떨어진 이 그로테스크한 ‘월국열차’의 종착역은 어디일까 궁금해졌다. 김정은의 힘겨운 ‘기차 행군’은 그의 옹색한 처지를 보여주는 듯했다. 하노이 담판 결렬로 북한이 핵 개발의 후과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는 게 분명해졌다. 북한은 영변 핵을 포기해서라도 제재를 풀어야 할 만큼 다급한 것이다. 그런데 이마저도 뜻대로 안 됐다. 핵 개발에 매달리면서 나라는 제 꼴을 갖추지 못했고, 인민의 삶은 기대에 크게 못 미치고 있다. 하노이 회담을 고비로 북의 ‘핵 벼랑끝 전술’은 내리막길로 들어섰다. 핵을 부분적으로 폐기하면서 경제도 챙기겠다는 ‘대미 줄타기 전략’은 여의치 않게 됐다. 싱가포르에선 트럼프에게 이 방식이 먹히는 듯했지만 이번엔 김정은이 외려 한 방 먹은 꼴이다. 핵 벼랑끝 전술은 고비마다 북한에 전술적 승리를 안기는 듯했지만 결과적으로 북한을 전략적 난국, 핵 수렁에 빠지게 했다. 이런 과정이 미국의 적대시 정책 때문이란 건 사실에 가깝다. 미국은 옛소련 몰락 이후 줄곧 북한이 붕괴하길 바라며 때론 윽박지르고 때론 무시했다. 핵을 막을 옵션을 제대로 사용한 적도 없다. 그렇다 해도 한반도에 핵 그림자를 드리운 북의 핵 개발 ‘원죄’가 면책되는 건 아니다. 하노이에서 트럼프가 한 일은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실무회담 합의문은 휴지통에 처박고 ‘전면 비핵화’ 요구 문서를 불쑥 건넨 건 전형적인 ‘깡패 외교’다. 게다가 생화학무기와 탄도미사일 폐기까지 얹었다니 사실상의 항복 요구다. 다만, 트럼프가 전임들과 다른 건 두 번이나 김정은을 만나 비핵화의 본질을 두고 대화하는 파격을 연출했다는 점이다. 동북아 지도자 중 문재인 대통령은 비교적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접근을 할 수 있는 처지에 있다. 시진핑도 중재할 수 있겠지만 미-중 대결이란 그레이트 게임에 제약을 받는다. 문 대통령이 트럼프의 무도한 요구를 억제하고, 김정은의 애매한 비핵화를 좀 더 명확하게 끌어올리는 ‘운전자’ 역할을 해야 한다. 김정은은 문재인과 트럼프, 시진핑으로 짜인 대진표를 기회 삼아 역사의 출구를 열어야 한다. 더는 핵 수렁에서 허우적거릴 시간이 없다. 제재 해제를 통한 경제 건설은 다름 아닌 북한 인민의 요구일 것이다. 장마당으로 대표되는 북한의 시장경제가 이미 권력이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위력적이란 분석은 많다. 김정은은 선택해야 한다. 애매한 비핵화로 줄타기를 계속할지, 벼랑끝 전술로 돌아갈지, 핵의 고르디우스 매듭을 끊을지 결단해야 한다. 고강도 벼랑끝 전술로 회귀한다 해도 효과는 제한적이고 핵 수렁으로 더욱 빠져들 뿐이다. 단계적·동시적 비핵화라 해도 시작과 종착점은 있어야 한다. 전체 조감도 없는 ‘깜깜이 비핵화’는 안 된다. 모든 핵을 일시에 내보이라는 건 무장해제와 다름없다는 북한 주장도 일리가 있다. 이 두 가지 입장이 어떤 형태로 조합될 수 있는지 관련국들이 머리를 맞대야 한다.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를 대체로 믿는다. 달리 뾰족한 길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뢰를 쌓아가며 단계적·동시적으로 나아가는 데도 동의한다. 하지만 이 과정이 순탄히 진행되려면 김정은이 비핵화의 전 여정을 어떤 형태로든 국제사회에 제시해야 한다. 김정은이 죽기 살기로 결단해야 할 대목이다. kcbae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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