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임시국회에서 벌어진 일련의 물리적 충돌이 타협의 정치를 제도화하기 위한 선거법 개정 과정에서 불거졌다는 사실은 꽤 아이러니하다. 정치 전문가들은 민주화 이후 30년이 지났지만 한국 정치는 날로 복잡하게 변해가는 이해관계와 가치를 정치로 수렴시키지 못하고 거리투쟁과 진영대립을 방치해왔다고 진단한다. 우리 사회가 갈등을 줄이고 통합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과감한 정치개혁을 통해 타협의 정치를 제도화해야 한다는 데 대부분 공감한다. 이는 촛불 민심의 요구이기도 했다. 4당 합의로 패스트트랙에 태운 선거제 개편 방안이 이런 요구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승자독식 선거제도와 사생결단의 정치구조를 좀 더 타협적으로 바꾸어놓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에서도 협치와 타협의 정치가 자리 잡은 나라일수록 사회적 대화와 타협도 성공적이다. 사회적 타협의 모델 국가로 칭송받는 네덜란드가 대표적이다. 우리한테도 익숙한 빔 콕 전 네덜란드 총리의 정치 이력을 보면 그는 노총위원장으로 바세나르 협약(1982년)을, 야당 당수이자 연정에 참여한 재무장관(부총리 겸임)으로 신노선 협약(1993)을 이끌어냈다. 총리로 재직하던 1999년에는 그 유명한 유연안전성 타협을 법제화하기도 했다. 여야와 보수·진보를 넘나드는 타협과 협치의 정치가 아니고는 상상할 수 없는 일련의 사회적 대타협으로 유럽의 병자로 조롱받던 네덜란드 경제를 회생시키고 만성적인 고용위기를 극복했다.
문재인 정부가 노심초사 많은 공을 들여온 경제사회노동위원회가 기대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하는 데는 노사관계 차원의 여러 문제도 있지만 진영논리에 빠져 대결을 일삼는 정치의 탓이 크다. 탄력근로와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렇다. 협약 비준은 대선 공약이고 20년 넘게 미뤄온 묵은 숙제라는 점에서 정부가 독자적으로 추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소야대와 국회선진화법의 벽을 넘기 위해 사회적 타협이라는 정당성을 획득하려다가 오히려 노사불신만 키우게 된 셈이다. 노동법에 관한 한 정당끼리 타협도 어려운데 노사가 쉽게 합의할 수 있겠는가 생각해보면 이는 너무나 자명한 이치다. 탄력근로에 관한 지난 2월 노사정 합의와 아이엘오 협약 비준을 위한 그동안의 협의 결과를 볼 때 경사노위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고 봐야 한다. 온갖 무리를 무릅쓰며 명목상의 대타협에 계속 목을 맨다면 사회적 대화 기구로서의 위상은 더욱 추락하고 정부에 부담만 안기게 될 수 있다는 점을 경계해야 한다.
정부도 지난 2년의 고용노동정책 성과를 평가하고 향후 3년을 새롭게 구상해야 할 시점이다. 그동안 정부는 최저임금 인상과 공공부문 비정규직 줄이기, 근로시간 단축에 너무 많은 힘을 쏟는 바람에 애초 구상했던 노동시장의 양극화 해소라는 더 큰 목표를 잊은 것처럼 보인다. 이제 탄력근로와 아이엘오 협약 비준 문제는 국회에 맡기고 경사노위는 민간부문 비정규직을 비롯한 저임 불안정 노동시장 전반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한 사회적 대화를 활성화해야 한다.
어차피 공공부문 비정규직을 없앤다고 민간기업 비정규직을 줄일 수 없고 최저임금 인상만으로 외환위기 이후 벌어질 대로 벌어진 임금격차를 해소할 수 없다. 격차를 확대하고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노동시장의 제도와 체질을 바꿔놓기 위한 사회적 대화와 타협이 절실한 이유다. 전체 취업자의 50%가 고용안전망의 사각지대에 있는 불편한 진실과 하청기업의 임금이 원청의 50% 수준으로 떨어지는 노동시장의 질서를 더는 방치할 수 없다. 또한 플랫폼 노동을 비롯하여 노동자의 지위도 얻지 못하는 특수고용종사자가 4차 산업혁명을 맞아 200만명을 넘어 확대일로에 있는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국가적 결단이 필요하다. 지금이야말로 노동시장의 패러다임과 체질을 바꾸기 위한 큰 이야기가 대화 테이블에 올라야 하고 최소 5년의 로드맵을 만들기 위한 사회적 대화와 타협을 경사노위가 주도해야 한다.
여러차례 확인되었듯이 절체절명의 위기가 아니라면 법 개정을 위한 사회적 타협 시도는 노사 불신을 키우고 사회적 대화를 사망으로 이끄는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최영기
한림대 객원교수·전 한국노동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