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 정의당 대표 선거가 시작됐다. 3선 의원인 심상정, 오랜 노동운동 경력의 양경규, 두 후보가 경합을 벌인다. 두 후보 모두 지난주에 출마 선언문을 발표했는데, 두 선언문 모두 눈길을 끄는 말을 하나씩 담고 있었다. 심상정 후보의 선언문에서는 “세습자본주의”가 눈에 들어왔다. 심 후보는 정의당이 앞장서서 혁파해야 할 대상을 세습자본주의라고 규정했다. 한편 양경규 후보의 선언문은 “민주적 사회주의”(이하 민주사회주의)를 부각했다. 양 후보는 21세기 한국 사회 변화의 방향이 민주사회주의라고 제시했다. 둘 다 시의적절한 문제제기이자 제안이다. 그간 진보정당은 한국 사회의 여러 병폐를 지적하면서도 이를 명쾌하게 아우르지는 못했다. 더불어민주당은 “적폐”와 싸운다 하고, 자유한국당은 “좌파 독재”에 맞선다고 한다. 그럼 정의당은 누구와 대결하는가? 분명 열심히 투쟁하는데, 정작 무엇과 투쟁하는지는 보수정당들만큼 시원하게 지목하지 못했다. 세습자본주의는 그 빈칸을 채울 이름으로 썩 어울린다. 무엇보다 현 체제가 거대한 허위이자 기만, 모순의 응집체임을 잘 드러낸다. 자본주의는 자유로운 경쟁을 약속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런 경쟁은 없다. 출발선이 서로 다른 소수와 다수가 있을 뿐이다. 소수가 늘 처음부터 승자로 출발할 수 있는 이유는 오직 독점과 특권에 있으며, 이는 대물림된다. 경쟁 체제라던 자본주의는 어느덧 그 이전 귀족 세상과 다름없는 세습 체제가 돼버렸다. 그럼 세습자본주의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세습하지 않는 자본주의를 지향하면 되는가? 아니다. ‘경쟁’을 가장 소리 높여 강조한 신자유주의 시기를 거치고 난 뒤에 우리 눈앞에 펼쳐진 세상의 모습은 그런 길이 애당초 없음을 보여준다. 지금 자유의 나라 미국은 1% 대 99%의 나라가 돼 있고, 타협의 나라라던 독일조차 소수 특권층의 부상 때문에 ‘재봉건화’됐다는 진단이 나오는 처지다. 세습자본주의란 자본주의의 일탈이 아니라 그 필연적 귀결이다. 경제 권력을 민주주의의 예외 지대에 방치해 두는 자본주의 질서는 새로운 귀족정으로 퇴행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새 귀족정은 과거의 귀족정과 마찬가지로 무능하기만 한다. 자신이 벌려 놓은 소득과 자산 격차를 완화할 수도 없고, 인류 문명 전체의 존폐가 달린 기후 위기를 해결할 수도 없다. 바로 이 점에서 민주사회주의가 주목된다. 세습자본주의라는 자본주의의 마지막 귀결이 문제라면, 이제 누군가는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선택지를 과감히 제시해야 한다. 한국 정치에도 자본주의 바깥을 가리키는 흐름이 부상해야 한다. 민주사회주의는 정의당 안에서 때맞춰 등장한 이런 흐름이라 할 만하다. 양경규 후보는 출마 선언문에서 ‘민주사회주의’의 ‘민주’가 단순히 ‘사회주의’를 수식하거나 에두르려는 말이 아니라고 밝혔다. 민주주의의 이상인 자유와 평등에 바탕을 두고 이와 충돌하는 자본주의 질서를 바꿔나가겠다는 원칙의 표명이라는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은 촛불 항쟁 이후 한국 사회의 고민과 직결된다. 촛불 시민들은 이미 박근혜나 이재용 같은 세습 권력들에 맞서 싸웠지만, 정권 교체 말고는 아직 뚜렷한 성과가 없다. 민주 항쟁은 자본 권력이라는 장벽 앞에서 돌파와 후퇴의 기로에 서 있다. 민주사회주의는 이 갈림길에서 후퇴가 아닌 돌파를 촉구하는 외침이다. 그러고 보면 ‘민주사회주의’는 외국의 영향을 받은 말이기는 하지만 결코 외래어라고만은 할 수 없다. 물론 세습자본주의 비판은 더욱 날카로워져야 하고, 민주사회주의의 내용은 더욱 채워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도 정의당의 두 대표 후보는 세습자본주의를, 민주사회주의를 더 많이, 더 시끄럽게 이야기해야 한다. 이를 통해 한국 사회 진로를 둘러싼 좀더 광범한 토론을 촉발해야 한다. 원래 진보정당의 역할은 제1야당이 되고 집권하길 희망하기 전에 이런 일부터 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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