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파리 유전학자 그 논문의 제1저자는 고등학생이다. 논문의 내용은 평이하다. 특정 환자군에게 나타나는 어떤 유전자의 다형성을 조사한 의학논문이다. 평범한 실험기법과 분석으로 국내 학술지의 영문판에 실렸다. 교신저자의 인터뷰와 여러 상황을 종합하면, 고등학생 1저자가 나올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물론 면밀한 조사가 진행돼야 확실히 알 수 있다. 황우석 사태가 생각난다. 다시 한번 국민 모두가 의학논문을 두고 실랑이 중이다. 이만하면, 이제 국민 모두 과학자가 하는 일에 깊은 관심을 가질 만도 한데, 그때나 지금이나 핵심은 논문의 내용이 아니다. 중요한 건 국민의 정서다. 황우석 사태에서 논문은 애국심을 건드렸고, 이번엔 대학입시에서 드러난 학벌계급의 문제를 건드렸다. 논문의 내용은 중요하지 않다. 논문을 둘러싼 계급적 맥락이 이 논란의 핵심이다. 논문에 한정한다면, 나는 이 논문의 내용은 물론 출판 과정에 대해 가장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전문가다. 지난 19년을 의생명과학 분야 연구자로 살았다는 경험 외에도, 지난 반년 고등학생과 함께 과학자가 되는 새로운 방법을 위한 탐험적 연구를 진행했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나 과학자가 되는 경험을 하는 세상이, 지금보다 더 건강하고 아름다울 것이라 확신한다. 동네에는 누구나 원하면 피아노를 배울 수 있는 학원이 있고, 원한다면 누구나 인생에 한번쯤 클래식 연주자가 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음악은 그렇게 우리 삶에 파고 들어 교양이 된다. 과학도 그랬으면 좋겠다. 이번 여름 나는, 바로 그 가능성을 탐구했다. 현실과 이상은 다르다. 학교 공부에 바쁜 아이가, 아무 이익도 없는 실험실 생활에 투자할 리 없다. 한국에선 학종 및 유학을 위해, 북미에선 더 좋은 대학에 입학하기 위한 도구로 실험실 참여가 권장된다. 나는 그 시장을 역으로 이용할 생각이다. 논문을 미끼로 실험실에 들어왔더라도, 과학이 선사하는 매력에 흠뻑 빠지게 할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올여름 내 실험실에선 그런 일이 일어났고, 과학자가 되는 경험이 사람을 변하게 만든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물론 이런 프로그램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과학자가 되는 방법을 제대로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고등학생이 의학논문의 제1저자가 된다는 건 영광이다. 그에게 저자 자격이 있는지의 여부는 법이 아니라, 과학자 사회가 오랫동안 건설해온 문화적 규범으로 결정된다. 2주 동안 실험을 진행하고 이후 논문의 출판 과정에 참여한 제1저자라면, 자격에 걸맞은 기록이 남겨져 있어야 한다. 실험 및 분석에 사용한 실험노트, 논문이 출판되는 과정에서 교신저자와 교환한 이메일 서신기록, 그리고 논문 내용을 발표했던 자료들이 자격의 근거가 된다. 나는 거의 매주 고등학생들에게 연구 내용을 팀원에게 발표하게 했고, 그 기록을 인터넷에 남겼다. 이런 논란을 피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스스로의 성장 과정을 지켜보며 빠르게 과학에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신저자와 후보의 자녀는 그 과정을 해명해야 한다. 저자의 자격은 오로지, 자신이 출판한 논문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또 책임질 수 있느냐는 기준을 따른다. 제1저자 논란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언론엔 그걸 검증할 능력이 없다. 오직 과학자 사회의 구성원들만이, 그 논문의 저자 자격을 판단할 수 있다. 언론도 국민도 아닌, 과학자만 할 수 있는 일이다. 그 논문은 국민정서의 역린을 건드렸다. 국민정서가 관여된 이상,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정면돌파다. 나도 처음엔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자격과, 자녀의 논문은 관련이 없다고 생각했다. 검찰개혁이라는 중대한 목표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문제를 덮고 가면, 잃을 게 더 많다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이 문제를 직시함으로써, 한국 사회가 그동안 방치해둔 학벌계급, 즉 ‘스카이캐슬’의 문제가 공론화될 수 있다. 검찰개혁만큼이나, 그 또한 중요한 문제다. 저자의 자격을 검증하자.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일이다. 필요하다면 나도 돕겠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