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철
논설위원
고속터미널역에서 서초역으로 올라가는 대로엔 “조국 구속” “조국 수호” , “문재인 탄핵” “문재인 최고” 구호가 사납게 맞부딪치며 밤하늘로 휘몰아치고 있었다. 박정희의 ‘국민교육헌장’ 낭독 육성을 쥐 죽은 듯 듣고 있는 ‘태극기 부대’의 끝을 지나니 마침내 ‘촛불의 물결’이 펼쳐졌다. 2016년에도 타올랐던 그 촛불이다.
지난 5일 밤 서초동 ‘촛불 바다’의 한가운데 서니 3년 전 이맘때가 떠올랐다. 그해 가을 끝자락 광화문의 풍경은 압도적이었다. 젊은 연인들이 한손에 촛불을 든 채 서로 손을 잡고 거리에 서 있었다. 그 촛불은 축복이요 카타르시스였다.
2019년 가을, 다시 촛불이 커졌다. ‘촛불혁명’ 3년 만의 일이다. 하지만 상황은 많이 다르다. 지난해 지방선거 이후 언제부턴가 촛불은 하강세를 탔고, 결국 시민들이 다시 거리에 섰다.
3년 전과 가장 큰 차이는 ‘반촛불’의 목소리가 거세졌다는 점이다. 탄핵 국면에서 제대로 소리조차 내지 못하던 ‘과거 회귀 세력’은 이제 촛불 앞을 가로막으며 그 불꽃마저 꺼뜨릴 기세다. 두 차례의 광화문 집회는 단순 동원으로만 보기 어려운 성격이었다. 보수의 대반격이 시작된 것이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것인가?
촛불의 최대 요구인 격차 해소가 기대에 못 미쳤다는 점을 먼저 들 수밖에 없다. 소득주도성장이라는 강령에 걸맞은 정책수단을 효과적으로 구사하지 못하면서 경제는 가장 큰 복병이 됐다. 촛불의 또 다른 요구인 개혁, 즉 검찰개혁·정치개혁·재벌개혁 역시 집권 초기 몇몇 조치를 제외하곤 답보 상태다. 북-미 협상의 교착, 한-일 갈등 등 외적 요인도 좋지 않다.
무엇보다 인사의 난맥상이 정권의 발목을 잡았다. 격차 해소, 제도 개혁의 미흡으로 주춤거리는 와중에 인사 난맥이 이어지면서 수세 국면으로 빠져들었다. ‘조국 정국’의 발화점이 문재인 대통령에 의해 발탁된 조국 법무부 장관과 윤석열 검찰총장이란 점은 뼈아프다. 그동안 집권 초기 몇몇 인사 말고는 촛불의 위용에 걸맞은 인사가 이루어졌다고 하기 어렵다. 진보의 최대 무기랄 수 있는 도덕성을 흠집내는 일이 권력 내부에서 종종 일어났다.
3년 전 강고했던 촛불의 대열이 흐트러진 점도 뼈아프다. 검찰개혁엔 동의하지만 ‘조국 수호’에는 고개를 갸우뚱하는 이들이 촛불의 주변에 머물러 있다.
서초동에서 촛불을 든 이들 마음의 ‘고갱이’는 촛불의 중심을 지키자는 것이다. ‘조국 수호, 검찰 개혁’ 구호는 오히려 표피적이다. 그 이면엔 검찰의 망동으로 또다시 촛불의 기둥이 쓰러지는 일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서초동에 잠시라도 머문다면 그들의 ‘단심’을 곧바로 헤아릴 수 있다.
가장 뼈아픈 대목은 젊은층의 이탈이다. 조국 장관 가족의 위법 여부와 별개로 진보 리더의 도덕적 흠결, 이중적 언행에 실망한 젊은이들이 촛불 대열에서 상당수 이탈했다. 서초동엔 아직 젊은이들이 많지만 3년 전과 비교할 바는 아니다. 젊은이가 없는 촛불은 언제 사그라들지 모르는 불꽃과 같다.
촛불을 함께 들었던 중도층의 이탈 역시 심각하다. 대통령 지지율 등 각종 여론조사 지표가 이를 보여준다. 중도층을 아우르지 못하면 선거든 개혁이든 앞으로 나아가기 어렵다.
지금의 수세 국면에서 어떻게든 벗어나야 한다. 총선을 6개월여 앞두고 촛불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운 형국이다. 지금 국면을 벗어나려면 그 원인으로부터 대책을 찾아야 한다.
무엇보다 인사의 난맥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조국과 윤석열이 지금 상황에서 각각 ‘촛불정부’의 법무장관과 검찰총장으로 머무는 게 적절한지 따져봐야 한다. 경쟁하듯 검찰개혁에 나서고 있는 두 사람이 머지않은 시점에 대강의 검찰개혁을 마무리하고 스스로 명예롭게 거취를 고민하는 게 좋다. 두 사람 문제를 엮으려 들지 말고 각각의 기준에 맞춰 질서있게 마무리해야 한다.
어쩌면 ‘조국 이후’가 더 중요할 수 있다. 무엇보다 젊은이들과 함께 가야 한다. 인사와 정책에서 그들의 아픔과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특단의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3년 전의 촛불로 돌아가야 한다. 강퍅하게 편가르고 내 편을 떼어내는 우를 범해선 안 된다. 정치 지도자들에게 기댈 것 없이 ‘촛불 시민’들이 먼저 그렇게 가야 한다. ‘대동의 촛불’로 가야 한다.
kcbae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