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네의 민주주의는 기원전 6세기 솔론의 개혁으로 확립됐다. 그전까지 귀족 중심의 ‘아르콘’이라 불리는 소수 집정관 체제였던 것이 평민들의 불만이 거듭되면서 모든 성인 남성이 참여하는 민회에 최종 결정권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고대 직접 민주주의의 출발인 셈이다.
‘인민에 의한 통치’라는 고대인들의 민주주의 정의는 현대에도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현대사회에서 이런 민주주의는 실현되기 어렵다. 고대 민주주의는 일반인들이 모두 상원의원과 비슷한 방식으로 정치를 생각한다고 상정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진행 중인 사안에 너무도 무지하다. 고대 그리스에서 실천된 ‘인민의 지배’로서의 민주주의는 복잡한 분업체계를 갖는 현대사회에선 불가능하다.
샤츠슈나이더는 <절반의 인민주권>에서 현대에 실현할 수 있는 ‘현실적 민주주의’를 탐구했는데, ‘인민에 의한 지배’가 아닌 ‘인민의 동의에 기반한 지배 혹은 정부’로 개념화했다. 그런 의미에서 절반의 인민주권이라 할 수 있다. 샤츠슈나이더는 “문제는 1억8천만명(1957년 집필 당시 미국 인구)의 아리스토텔레스들이 어떻게 민주주의를 운영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1억8천만명의 보통 사람들로 구성된 정치공동체를 어떻게 조직해야 공동체가 보통 사람들의 요구에 응답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는 리더십, 조직, 대안, 그리고 책임과 신뢰의 체계에 관한 문제”라고 했다.
2019년 촛불은 민주주의의 오랜 이상인 직접 민주주의의 발현이다. 보수 진영의 광화문 집회도 큰 틀에서 그렇다. 우리나라처럼 직접 민주주의가 고양된 나라도 드물다. 정치의식만 놓고 보면 우리 시민들은 ‘상원의원’ 못지않다.
하지만 현대 정치에선 상원의원조차 모든 걸 할 수는 없다. 샤츠슈나이더는 “현대 민주주의는 정당이 중심이고, 정당이 갈등을 사회적으로 관리함으로써 인민의 참여를 고양시키는 것”이라고 했다. 정당을 통해 인민의 요구와 이해가 관철돼야 한다는 얘기다. 거리의 정치가 거듭될수록 정당, 정부, 지도자들은 시민의 요구를 구체적인 인사와 정책으로 수렴하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한다.
백기철 논설위원 kcbae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