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희 ㅣ ‘반갑다 친구야!’ 사무국장
언제부턴가 ‘서울 출생’이 강력한 스펙으로 통한다. 그 이유는 서울 집값이 설명해준다. 서울 아파트 셋 중 한 채는 시세 9억원이 넘고, 서초·강남은 92%가 9억원이 넘는다. 서울에서 최근 1년 사이 입주한 새 아파트는 분양가에 견줘 평균 3억원씩 올랐다. 공시가격 9억원이 넘는 아파트는 지난해보다 50% 이상 늘었다. 서울 집값이 가파르게 뛰면서 지역과 격차는 그만큼 더 벌어졌다. 그래서 ‘서울 출생’은 단순한 출신지 정보를 넘어 일정 수준의 경제적 배경을 보증해주며 스펙이 되었다. 서울 밖에서 태어나는 순간 이미 가장 확실한 스펙 하나를 놓치고 출발하는 셈이다.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강력한 스펙이 하나 더 있다. 학벌이다. 출생지는 선택할 수 없지만, 출신 학교는 선택 가능하다. 오랫동안 서울 유명 대학 출신이라는 스펙은 좋은 직장을 보장해주었고, ‘인 서울’은 대다수 수험생의 목표가 됐다. 그동안 지역 대학들의 취업 성적표를 보면 ‘끄트머리라도 무조건 인 서울 해야 한다’는 말에 쉽게 반박할 수 없었다.
그런데 최근 몇해 ‘탈북보다 어렵다’는 취업난을 겪으면서 그 공식에 금이 가는 것이 눈에 띈다. 올해 주변 수험생들의 대학 지원에서도 확인된다. 이른바 ‘인 서울’ 할 수 있는 성적이지만, 지역 대학에 지원하는 수험생들에게 이유를 물었다. 대답이 하나로 모아졌다. 어차피 서울에 있는 대학을 가도 취업이 힘들기는 마찬가지니 지역 대학에 가서 지역인재 채용문이 넓은 공무원이나 공기업 취업에 도전해보겠다는 것이다. 물론 최상위권 수험생들은 여전히 서울 유명 대학을 최우선 선택지로 둔다. 그러나 종전에 성적만 되면 일단 서울로 가던 분위기에 변화가 감지된다.
이런 변화의 배경에는 공공분야와 일부 기업에서 실시하는 지역인재 우선 채용 제도가 한몫하는 것으로 보인다. 국가직 공무원 채용에서 지방인재 채용 목표제, 지역인재 채용 추천제, 지역별 구분 모집 제도가 있고, 지역 이전 공공기관의 지역인재 의무채용, 기업 공채에서 지역인재 할당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지역 이전 공공기관의 경우, 2022년까지 신규 채용자 가운데 30%를 지역 고교나 대학 졸업자를 뽑도록 법률로 정하고 있다. 지난해 18%를 시작으로 해마다 3%포인트씩 차례로 늘려나간다. 지난해 채용 실적을 보면, 신규 채용자 가운데 지역인재 비율이 23.4%로 법률이 정한 목표치를 넘어섰다. 지역 청년 1423명이 새로 채용됐다. 좋은 일자리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지역 청년들에게 공공기관의 취업문이 넓어진 것은 반길 일이다.
물론 비판도 따른다. 제도가 정착될수록 서울 역차별이라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취업 경쟁에 지친 청년들의 불만은 이해하지만, 전반적인 서울과 지역 간의 심각한 불균형을 봤을 때 지역인재 우선 채용이 역차별이라는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 공공기관에 일정 비율로 우선 취업할 수 있는 인센티브조차 없다면, 서울로 빠져나가는 청년들은 해마다 더 늘 수밖에 없다. 이는 곧 지역 공동화로 이어지고, 국토의 고른 발전은 멀어진다.
지역인재 의무 채용 확대는 비단 지역 청년들의 취업 문제뿐 아니라 근본적인 지역 불균형 문제를 풀 열쇠가 된다. 나고 자란 지역의 고교와 대학을 나와 좋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으면 자연스럽게 지역에 터 잡고 살게 된다. 수도권 과밀에 따른 부동산시장 과열 등 갖가지 부작용을 완화할 수 있다. 교육과 소득 격차 완화로 지역 격차를 줄이려면 지역인재 의무 채용을 과감하게 더 늘려야 한다. 약속이나 권고가 아니라 법률로 단단하게 의무화해야 실질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다.
지역인재 의무 채용 폭을 넓히려는 움직임은 있지만 충분히 힘을 받지 못하고 있다. 공공기관의 신규 채용 인원 가운데 40%를 지역인재로 뽑도록 의무화하는 법률안이 발의됐지만 국회에서 잠자고 있다. ‘지방대학 및 지역균형인재 육성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안이다. 아쉽게도 이번 국회에서는 통과되기 어려워 보이지만, 지역인재를 폭넓게 채용하는 데 토대가 될 법률이 더 적극적으로 추진되기를 다음 국회에 미리 당부해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