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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주진형 칼럼] 집착이 된 미망

등록 2020-02-04 18:18수정 2020-02-05 09:30

주진형 ㅣ 전 한화투자증권 대표이사

과거에 정치가가 한 말을 기억했다가 현재 상황과 비교해 들이대는 것은 정치가에게 불편할 수 있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숙명이기도 하다. 정치는 국민에게 꿈을 팔아 권력을 얻는 직업이니 말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올해 1월7일 신년사에서 “부동산 투기와의 전쟁에서 결코 지지 않겠다”고 말했다. 일주일 뒤 신년 기자회견에서도 “더욱 강력한 대책을 끊임없이 내놓을 것”이라고 예고했다. 하루 뒤 라디오에 출연한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은 “강남 집값 안정이 목표다. 경제학적으로 정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정책 메뉴를 다 갖고 있다. 12월16일에 절대 소진한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한마디로 이번 대책도 안 통하면 추가 대책을 내놓겠다는 것이다.

언젠가 이 표현을 들은 적이 있어 기억을 더듬었다.

“이번에 정부가 발표한 부동산 대책이 역대 가장 강력한 대책이기 때문에 그것으로 부동산 가격을 충분히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만약에 부동산 가격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시간이 지난 뒤에 또다시 오르는 기미가 보인다면 또 정부는 더 강력한 대책도 주머니 속에 많이 넣어두고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한 말이다. 언제 했을까?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했다. 여기서 그가 말한 “역대 가장 강력한 대책”은 소위 8·2 대책이다. 이때 정부는 서울 25개구 전역을 한꺼번에 투기과열지구로 지정했고, 주택담보대출비율(LTV)과 총부채상환비율(DTI)을 40%로 하향 조정했고, 1주택자라도 2년 이상 거주하지 않았으면 양도세 면제를 해주지 않기로 했고, 재건축 초과이익환수제를 부활시켰다. 다주택자의 투자 수요를 억제해 주택 가격을 안정시키겠다는 문재인 정부의 주택 시장 정책 기조는 이때 정해졌다. 그리고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 실패 역시 이때 정해졌다.

당시 나는 문 대통령의 이 발언을 듣고 암울한 마음을 누를 수 없었다. 주택 시장에는 자기 집 거주 수요와 임대 거주 수요가 공존하게 마련이다. 누군가는 다주택자여야 임대 거주가 가능하다. 그래서 어느 나라나 자기 집 보유 비율이 70%를 넘기 어렵다. 주택 시장은 자산 시장이기도 하다. 자산 가격을 기준으로 정책을 정하면 안 된다는 건 상식이다. 가격은 환자로 치면 열이다. 열이 너무 높으면 그것만으로도 환자가 죽을 수 있다. 하지만 병을 안 고치고 열만 내리려고 하면 안 된다. 근본적으론 병의 원인을 치유해야 한다. 그런데도 가격을 부동산 정책의 잣대로 삼겠다는 것은 나머지를 모두 부차적인 이슈로 보겠다는 말이다. 다주택자를 때려잡아 주택 가격을 낮추겠다는 것은 좌파들의 오래된 착각인데 문 대통령은 아예 이를 정책 기조로 삼겠다고 하니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의 부동산 시장은 다른 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괴상한 정책들이 유독 한곳에 덕지덕지 모인 분야다. 개발독재 시절 만든 토지 사용 규제, 분양가 상한과 청약제에 의해 왜곡된 신규주택 공급 시장, 부동산 투자자에게 유리하게 기울어진 보유세와 양도소득세제, 상환 능력은 무시하는 대신 과도하게 낮은 엘티브이를 통한 금융 규제 등 각각 하나하나가 다른 나라에선 보기 힘든 제도다. 부동산 가격이 너무 높은 현상은 바로 이러한 잘못된 제도들이 덧쌓여서 생긴 문제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러나 문 대통령은 근본적인 개혁은 팽개치고 그저 가격만 보고 가겠다, 그것도 다주택자 하나만 잡아 가격을 잡겠다고 했다.

서울의 다주택자 수를 줄이면 만사형통인 척하는 착각은 이제 미망(迷妄)을 지나 집착이 된 것 같다. “더욱 강력한 대책을 끊임없이 내놓을 것”이라는 말을 다시 들으면서 대통령의 주머니가 도대체 얼마나 큰지 궁금해질 정도다. 아직 쓰지 않은 정책이 주머니에 많다는 김상조 정책실장은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그게 무슨 자랑이나 되는 줄로 착각할 정도다. 2년 반 동안 똑같은 소리만 하면서 지냈으면 지금쯤이면 대책이 많음을 자랑하지 말고 무엇을 잘못했는지 반성부터 할 때가 아닌가?

“역대 가장 강력한 대책”을 들고나온 뒤 2년 반이 지나는 동안 부동산 대책을 수도 없이 더 쏟아내면서 문 대통령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궁금하다. 경제에 대해 잘 모른다는 소리를 듣던 대통령으로서 부동산 정책을 노무현 정권 시절 같이 일하던 사람에게 맡겼는데 성과는커녕 도리어 역효과만 나고 가격은 더 불안정해지니 속이 탈 것이다. 그렇게 많은 정책을 같은 주머니에서 꺼내 썼는데도 효과가 없었다면 애초에 그 주머니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할 때가 되었다. 명의는 칼을 여러번 찌르지 않는다는 추미애 법무부 장관의 말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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