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인(命人) ㅣ <회사를 해고하다> 저자
고흥만은 본디 바다였다. 그 바다는 거기서 나고 자란 내 친구들이 물이 나면 때에 따라 낙지와 소라, 꼬막, 그리고 온갖 조개를 잡던 갯벌이었고, 남해안 바다 생물의 최대 산란지이기도 했다. 아직도 갯벌은, 점유는 할 수 있어도 소유는 할 수 없는 곳이다. 그 바다는 그저, 아주 오래도록 그 바다를 끼고 있는 마을 사람들의 것이었다.
9년 전, 내가 처음 본 고흥만은 드넓은 논이었다. 정부는 농경지를 만들어주겠다며 1991년부터 2012년까지 국비 4000억원을 쏟아부어 바다를 메웠다 한다. 단순 매립지와 달리 농지조성에는 농로, 수로, 평탄 작업 등을 위해 많은 자본이 들어간다고 한다. 그때 그 바다를 끼고 살던 고흥읍, 풍양면, 도덕면, 두원면 등 44개의 마을 사람들은 조상 대대로 이어져온 생활 터전을 잃었고, 고향의 추억도 잃었다.
그러나 그 바다에 대한 기억이 없는 나에게 고흥만은 철에 따라 푸르거나 황금빛인 논길이고, 때에 따라 바람에 일렁이는 갈대의 향연을 만끽하며 난생처음 철새들의 이름을 배운 곳이다. 이 지역은 총 46과 150종의 조류가 확인되었고, 그중 법정 보호종은 황새(멸종위기Ⅰ급·천연기념물 199호), 저어새(멸종Ⅰ급·천 205-1호), 매(멸종Ⅰ급·천 323-7호), 큰고니(멸종Ⅱ급·천 201-2호), 팔색조(멸종Ⅱ급·천 204호), 노랑부리저어새(멸종Ⅱ급·천 205-2호), 참매(멸종Ⅱ급·천 323-1호), 붉은배새매(멸종Ⅱ급·천 323-2호), 새매(멸종Ⅱ급·천 323-4호), 잿빛개구리매(멸종Ⅱ급·천 323-6호), 검은머리물떼새(멸종Ⅱ급·천 326호), 큰기러기(멸종Ⅱ급), 긴꼬리딱새(멸종Ⅱ급), 물수리(멸종Ⅱ급), 검은머리갈매기(멸종Ⅱ급), 새호리기(멸종Ⅱ급), 황조롱이(천 323-8호), 소쩍새(천 324-6호), 두견이(천 447호), 큰말똥가리(멸종Ⅱ급) 등 20종이나 된다고 한다.
그런데 그 간척지에서 주민들이 농사를 짓기 시작한 지 불과 3년도 되지 않아 정부는 그곳에 국가종합비행시험장을 만들겠다는 사업을 추진한다. 이 사업은 2015년 국토교통부와 산업통상자원부가 합의하고, 이낙연 당시 전남도지사가 고흥군수와 함께 ‘협력 국책사업’으로 적극 추진했다고 하는데, 정부가 이 사업의 상위 계획으로 제시하는 ‘항공산업발전 기본계획’은 2010년에 세워졌다고 하니 주민의 희생과 국민의 혈세로 건설된 목적시설을 정부는 완공 직전인 2010년부터 다른 용도로 바꾸려 한 어이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농지 완공 이후 정부가 비행시험장 목적으로 계획을 추진하는 동안 한편으론 수백억원의 추가적인 농업 기반 사업비를 투입했다니 이건 또 무슨 일일까?
고흥 사람들이 이번엔 농지를 잃을 처지다. 지금 정부가 사업지로 선정한 곳은 고흥만 일대의 37만평(122만3140.5㎡)이지만, 정부가 고흥을 선정한 이유 중 하나로 ‘미래 부지 확장 가능성’을 꼽고 있으니 농지를 얼마나 더 잃게 될지 알 수 없을뿐더러 근처에서 농사짓는 사람들은 안전성이 검증되지 않은 비행기들의 시험비행 아래에서 목숨을 담보로 일하게 된다. 기존 항공센터의 소규모 비행시험만으로도 이미 8건의 추락 사고가 있었으며, 이 중에는 날개 길이 22m의 무인기가 득량만 건너 장흥군 노인정으로 추락하는 큰 사고도 있었다. 하루에도 수십 대의 비행기가 할퀴고 가는 소음은 또 어떠할까?
나는 국가종합비행시험장 건설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잘 모르겠다. 왜냐하면 정부 부처나 지방자치단체의 누구도 이 고흥만이 간직한 수많은 사람들의 사연은 들으려 하지 않고, 절박하게 그 필요성을 설득하려 하지도 않으니까. 때마다 그래 왔듯이 주민설명회도 환경영향평가도 졸속이고 형식일 뿐이다.
올겨울에도 어김없이 큰고니 떼와 큰기러기 떼가 월동하러 고흥만에 왔다. 정부의 환경영향평가엔 이들을 보호할 대책은 없고, 조류 충돌(새와 비행기가 부딪히는 사고)에 대한 대책으로 엽탄, 로봇, 레이저 등을 이용해 ‘퇴치’하거나 식생 관리를 통해 서식처를 없애겠다는 방안만 제시되고 있다 한다. 이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늘도 고흥만의 파란 하늘엔 기러기 떼 줄지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