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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정찬의 세상의 저녁] 다큐멘터리 영화 ‘부재의 기억’

등록 2020-02-27 18:14수정 2020-02-28 15:54

<부재의 기억> 포스터.
<부재의 기억> 포스터.

지난 2월9일 세월호 희생자 어머니 두 분이 단원고 아이들의 캐리커처를 그린 스카프를 펼쳐 들고 아카데미 시상식 레드카펫을 걸었다. 이승준 감독의 <부재의 기억>(In the Absence)이 한국영화 최초로 아카데미 단편 다큐멘터리 부문 후보에 올랐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수상은 못 했지만 세월호의 비극, 그 심해와 같은 캄캄한 진실을 세계에 알리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이승준 감독이 주목한 것은 세월호에 스며든 고통이었다. 고통이 거기에 있는 한 이야기가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그는 고통의 시작점인 2014년 4월16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배가 기울기 시작한 이후 배 안에서, 배 밖에서 오간 이야기들과 풍경들이 있어야 했던 것이다. ‘416기록단’은 수천 시간에 이르는 영상 기록을 이승준 감독에게 기꺼이 건넸다. ‘416기록단’이 존재하지 않았으면 <부재의 기억>은 만들어지지 못했거나 다른 모습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당시 유가족들은 언론에 대한 불신으로 촬영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유일한 예외가 ‘416기록단’이었다. 기존 미디어들이 제구실을 못 하고 있을 때 ‘지금 기록하지 않으면 영원히 진상을 밝힐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독립피디들의 절실한 마음이 모여 만든 ‘416기록단’의 진정성이 유가족들의 마음을 연 것이다. 바지선에 올라 시신 인양을 직접 촬영할 수 있었던 것은 유가족들이 ‘416기록단’의 카메라를 자신들의 카메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부재의 기억>에서 세월호 생존자 김승묵은 탈출 당시를 회상하면서 “그곳에 우리를 지키는 누군가는 없었다. 정말 단 한 명도…”라고 말했다.

“대통령께서 직접 구조를 하는 분은 아닙니다. 그날 여러 차례 전화를 하고 여러 차례 문서를 보내 지침을 받았습니다.” “대통령은 노셔도 돼요, 7시간. 현장 책임자만 잘 임명해주시면.” “고위공무원들한테 묻겠습니다. 저희는 그 당시 생각이 다 나요. 잊을 수 없고 뼈에 사무치는데 사회지도층이신 고위공무원께서는 왜 모르고 왜 기억이 안 나는지….”

2016년 12월 국정조사에서 김기춘 비서실장, 정유섭 새누리당 의원, 민간잠수사 김관홍이 했던 발언이 차례로 화면에 나온다. 앞의 두 사람과 달리 김관홍의 목소리에는 울음이 배어 있다. “아빠가 가서 저 사람들 다 구해줘. 아빠는 할 수 있잖아”라는 어린 딸의 말에 본업을 접고 팽목항으로 달려간 김관홍은 딸의 바람과 달리 구조 대신 시신 인양 작업을 해야 했다.

“한 구 한 구 모시고 나올 때 온몸으로 다 느껴요. 육체적인 건 다스려 가면 되는데 머릿속에, 마음속에 있는 건… 죽은 아이들이나 그 가족들은 저희한테 아무 짓도 안 해요. 꿈속에서도 안 해요. 되레 산 자들이, 살아 있는 사람들이 저희를 죽이는 거예요.”

김관홍이 자살한 것은 2016년 6월17일이었다. 김관홍과 함께 세월호 희생자들을 수습했던 민간잠수사 전광근은 <부재의 기억>에서 “배 안에서 학생들이 살려고 노력했던 흔적들이 많았다. 이인 객실에서도 일곱명 여덟명이 모여…”라면서 말을 잇지 못한다.

선내 객실의 미로 같은 공간을 떠돌던 화면은 주인 잃은 운동화들에 머문다. 물에 가라앉아 형태가 변형된 각양각색의 운동화 위로 물 흐르는 소리, 잠수사의 숨쉬는 소리가 떠돈다. 당시 팽목항에는 집이 있는 방향을 향해 가지런히 놓인 운동화들이 자주 보였다. 어둡고 차디찬 바닷속에서 나와 새 운동화를 신고 집에 가자는 부모의 애끓는 마음의 표현이었다. 그 작고 쓸쓸한 운동화가 때로는 새처럼 보이기도 했을 것이다. 금방이라도 날개를 펴고 어디론가 날아갈 것 같은.

팽목항 입구 갯벌 매립지에 잿빛 컨테이너가 있었다. 사고 해역 주변에서 거둔 물건들 가운데 주인을 찾을 수 없는 것들을 모아둔 유류품 보관소였다. 거기에도 운동화가 있었다. 진흙 묻은 옷가지와 바닷물에 젖어 풀 죽은 인형, 변색된 가방과 모자가 있었고, 줄 끊어진 기타도 있었다. 그 물건들 속에는 물속으로 사라진 아이들이 하고 싶었던 말들, 하지만 끝내 하지 못한 말들이 스며들어 수런거리고 있었을 것이다. 예술가는, 그가 진정성 있는 예술가라면 그들의 수런거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부재의 기억>은 귀를 기울이는 예술가가 만든 작품으로 내게 다가온다.

정찬 ㅣ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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