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사태에 대한 뛰어난 대처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박근혜 정부 때 겪은 메르스 사태나 세월호 사고를 교훈 삼아 미리 준비한 덕분이라고도 칭찬한다.
그렇다면 이천 화재 사건은 어떤가? 비슷한 사건은 12년 전에도 있었다. 그런데 왜 이런 사고는 끊임없이 반복되는가?
그런 사망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원천적으로 노동자들이 현장에서 자기 자신이 하는 작업에 대한 통제권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부처님 오신 날 손자 손을 잡고 전주 한옥마을을 걸었다. 방문객이 얼마나 많았는지, 공영주차장에는 주차할 곳이 없었다. 코로나19 확진자가 갑자기 폭증하던 때를 생각하면 이런 일상의 회복이 너무나 감사하다. 하기야 지금처럼 신규 코로나 확진자 수가 줄어들기 전에도 내가 특별히 일상에서 불편을 겪은 것은 아니다. 면마스크를 빨아서 쓰고 다녔으니 마스크 사겠다고 약국 앞에 줄 서본 일도 없고, 나라에서 이동을 통제한 적 없으니 매일 가던 식당에서 평소와 다름없이 밥을 먹고 피아노 학원에서 레슨을 받았다.
생각해보면 내가 그렇게 태평했던 까닭은 걱정보다 믿음이 더 컸기 때문이다. 광주는 인구 150만인데 누적 확진자가 서른명이고 사망자는 아직 단 한명도 없다. 병상은 남아서 한동안 대구 환자들을 받아줄 정도였다. 그런데 내가 무슨 걱정을 할 일이 있었겠는가. <뜻으로 본 한국 역사>의 함석헌의 가르침에 따르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끼리 믿는 것이 진짜 믿음이다. 그래서 나도 믿었다. 내가 선택한 대통령을 믿었고, 그가 믿은 질병관리본부장을 믿었고, 이 나라의 모든 의사와 간호사들을 믿었다. 신천지 법인 취소한 서울시장을 믿었고, 재난기본소득을 통해 일거에 기본소득을 보편적 의제로 만든 경기지사도 믿었고, 해고 없는 도시를 선언한 전주시장을 믿었고, 광주 북구청 공무원들을 믿었다. 그리고 사재기하지 않는 내 이웃을 믿었다. 생각하면 40년 전 5·18 그 절망적인 시간에도 광주 시민들은 사재기 대신 주먹밥을 만들어 같이 먹었었다. 5·18이 일어난 지 40년, 그 시절 나는 내 나라가 정말 부끄러웠는데, 문득 나는 지금 이런 나라에서 이런 사람들과 같이 사는 것에 눈물겹게 감사한다. 마치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제자로서 아테네의 시민으로 살았던 것을 신에게 감사했듯이.
그런데 왜 나는 지금 다시 내가 한국인인 것이 부끄러워지는가? 며칠 전 이천의 어느 공사장에서 불이 나 38명이 순식간에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그 바로 다음 날 김해의 어느 폐기물 처리업체에서 용접작업을 하던 노동자가 폭발화재로 숨졌다. 이런 식의 산업재해로 사망한 사람이 2019년 855명이다. 그 가운데 건설노동자가 가장 많은 428명이었다. 그나마 이 숫자는 2018년의 전체 971명, 건설업 485명에 비하면 비교적 큰 폭으로 줄어든 것인데도 그렇다. 1만명당 산업재해 사망자 비율을 보면 건설업의 경우 5년 전에는 영국보다 10배, 2년 전에는 조금 격차가 줄었다지만 여전히 8.8배였다. 2년 전 통계로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가운데 한국보다 산업재해 만인 사망률이 높은 나라는 터키와 멕시코 두 나라뿐이었다. 코로나 와중에서 빛을 발한 이른바 케이(K)-방역으로 이제는 한국이 진짜 선진국이라고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천의 화재 사망 사건을 보면 적어도 노동의 관점에서는 우리나라가 후진국 중에서도 한참 후진국임을 부인할 수 없다.
이번의 코로나 사태에 대한 뛰어난 대처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박근혜 정부 때 겪은 메르스 사태나 세월호 사고를 교훈 삼아 미리 준비한 덕분이라고도 칭찬한다. 그렇다면 이천 화재 사건은 어떤가? 비슷한 사건은 12년 전에도 있었다. 그런데 왜 이런 사고는 끊임없이 반복되는가?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보면, 우리는 아무런 보호 장비 없이 맨홀이나 정화조나 무슨 탱크 속에 들어가 작업하다가 유독가스에 질식되어 숨졌다는 보도를 수도 없이 많이 접하게 된다. 사람값이 얼마나 싸면, 가스 마스크 하나보다 가치가 없단 말인가?
이런 사건이 일어나면 누구라도 가장 먼저 사업주의 법적 책임을 강화하고 사고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자는 생각을 하게 마련이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나도 생각한다. 하지만 세상의 어떤 문제도 사후의 처벌만으로 모두 예방하기는 어렵다. 그런 사망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원천적으로 노동자들이 현장에서 자기 자신이 하는 작업에 대한 통제권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노동자들이 기업의 최고 의사결정에 관해서 그리고 현장의 작업조건에 관해서 공동의 결정권을 가질 때 우리는 이런 비극을 원천적으로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계속 노동자의 경영참여를 요구해온 이유이다.
문제는 노사공동결정이 기업별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업별 공동결정제도는 삼성 반도체에서 일하는 정규직 노동자들을 백혈병에서 보호해줄 수 있겠지만, 비정규 건설노동자들은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으므로 지속적인 공동결정의 주체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비정규 노동자들에게 노사공동결정제도가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5년 전 내가 광주형 일자리 사업에 참여했을 때 고민했던 것이 바로 이 문제였다. 모든 노동이 정규직일 수 없고, 어떤 종류 어떤 방식으로든 비정규 노동이 있을 수밖에 없다면, 어떻게 해야 비정규 노동자들이 쓰고 버려지는 물건이 아니라 주체적인 인간으로서 일하게 만들 수 있을까?
그때 나와 동료들이 생각했던 대안은 노·사·민·정이 결합하여 새로운 형태의 공공적 인력파견업체를 만들자는 거였다. 우리는 그 새로운 회사에 ‘광주 퍼스널 서비스’라는 이름을 붙이고 앞글자를 따 지피에스(GPS)라고 불렀는데, 비록 그때마다 노동자들이 일하는 곳은 달라지더라도 지피에스를 비정규 노동자들이 들고 나는 지속적 거점으로 만들자 생각했다. 우리는 지피에스에서 다른 무엇보다 노사가 협력하여 노동자들을 교육함으로써 노동의 주체성과 전문성 그리고 윤리성을 기르고, 그런 협력에 기반해 사업주의 입장에서는 노동의 생산성과 책임성을 높이고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노동의 주체성과 노동자의 권익을 도모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편의점 알바부터 일용직 건설노동자까지 다양한 종류의 비정규 노동을 위한 공공적인 플랫폼을 만들자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그런 망상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광주형 일자리 사업과 나의 인연도 오래전에 끝나고 말았다.
그런데 이천의 화재 사건을 보며 잊었던 내 꿈을 다시 생각한다. ‘배달의 민족’이 수수료를 올린다고 발표했을 때 이재명 경기지사는 즉각 경기도 차원에서 공공적인 배달앱을 만들겠다고 응수했고 그 단호한 대처로 수수료 인상은 없던 일이 되었다. 그런 열정과 상상력이라면, 나와 동료들이 5년 전에 꾸었던 꿈도 터무니없는 망상은 아니지 않을까? 경기도나 서울시가 마음만 먹는다면, 내가 상상했던 지피에스보다 훨씬 더 멋있는 서울형 또는 경기형 비정규 노동 플랫폼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우리는 언제까지 가난한 이웃의 죽음을 바라만 보고 있어야 하겠는가?
전남대 철학과 교수